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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태국

지난 여행기 - 2000방콕&푸켓2

by 장돌뱅이. 2017. 8. 24.

31. 엠포리움 백화점과 짜뚜짝 시장
시인 안도현은 이 세상살이가 살기 힘들고 외로워진 것은 도시가 생겼기 때문이고
도시가 생기면서 장터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편리함과 세련됨을 상징으로 하는 도시의 삶은 종종 끈끈한 사람과의 관계를 바탕에
두지 않는 메마르고 앙상한 모습이기 십상이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의 전통 생활 속에서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장소 이상의 의미였다. 


"오랫동안 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우리네에게 5일만에 서는 장날은 곧 모두의 만남의 장이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일상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고, 소식을 전해주고 받는 삶의 총체적 현장이었다.
인터넷이나 전자 상거래 등 정보와 생활이 시·공간을 초월해서 이루어지는 가상공간이 아니라
실제 구체적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우리 생활의 한 단면이었다.

거기에는 몇백 원 몇천 원은 당연히 깍게 마련인 흥정이 있고, 시끌벅적하고 얼큰한 취흥이 감도는
주막집의 하얗게 서린 김이 있으며, 갈치 꼬랭이 한 마리를 사들고 돌아오는 길의 푸르른 달밤의 정취가 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흥얼거리는 팔자걸음 속엔 지금껏 인생길이 그러했듯이, 재촉할 것이 없는 여유로움과
녹녹함이 담겨있다. 밥상을 차려놓고 밥을 담아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둔 채 아버지가 장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온 식구의 기다림이 있고, 쓸쓸함이 길게 그림자 드리운 고샅길의 아련한 그리움이 있다."
 -이흥재의 글-


방콕에 있는 짜뚜짝 주말시장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직접 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LONELY PLANET 방콕에는 '태국 시장의 디즈니랜드'라고 소개하고 있다.

짜뚜짝시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장터나 시장을 거대하게 확대시켜 놓은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여행자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눈에 띄지만 이곳은 아직 태국인들이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더 많이 필요로 하는 곳인 듯 하다.


*위 사진 : 담넌사두악 수상시장에서


(여행객들을 상대하는 것이 태국인들의 중요한 생활이긴 하지만)
다분히 여행객 용으로 변화된
방콕의 담넌사두악을 포함한 수상시장을 생각해보면 그 차별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주말에는 2십만명 이상의 방문객과 8600개 이상의 노점상 가판대가 몰린다고 하니 대단한 장소이다.


일요일 아침 호텔을 나서 짜뚜짝 시장에 들어섰을 땐 이미 장이 한창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물결처럼 흐르는 대열 속으로 우리도 즐겁게 스며 들었다.
특별히 무엇을 사야겠다는 계획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발길 닿는 데로 시장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시장은 늘 축제 분위기이다. 곳곳의 수많은 종류의 가게와 물품을 나는 일일이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짜두짝시장의 모습을 우리의 장터거리를 빗대어 설명해도 크게 잘못은 아닐 것 같다.
어차피 '없는 것이 없는' 장소이기는 마찬가지이므로.


담배 파는 연초전, 담뱃대를 파는 연죽전, 말총이나 피물과를 파는 상전,
백미와 잡곡을 파는 시겟전, 진 어물을 파는 생선전, 마른 어물을 파는 좌반전,
놋그릇을 파는 유기전, 누룩을 파는 곡자전, 솜을 파는 면자전, 돗자리를 파는 인석전,
실만 파는 진사전, 꿀을 파는 청밀전, 각종 물감을 파는 화피전, 소금 파는 경염전,
다리머리를 파는 다리전, 목재를 파는 내장목전, 쇠붙이나 낫을 파는 철물전, 마구만 파는 마전,
과일을 파는 우전, 잡화를 파는 잡전, 제기를 세놓는 세물전, 짚신을 파는 승혜전, 목물을 파는 물상전,
흰 갓만 파는 백립전, 검은 갓만 파는 흑립전, 바늘을 파는 침자전, 볏집을 파는 고초전,
신창을 갈아주는 이저전, 죽기를 파는 파자전,
칼 파는 도자전, 돼지를 내다 파는 저전,
꿩·오리를 잡아다 파는 어리전, 분가루를 파는 분전, 무영과 기환을 파는 샌전, 씨앗을 파는 잡살전,
족두리와 노리개를 파는 족두리전, 간장·된장을 내다 파는 외해전, 장롱을 파는 장전, 장작을 파는 시목전,
점사람들이 나와 앉은 옹기전, 한지를 파는 지물전......


시간이 한 낮을 향하면서 냉방이 되지 않는 시장 안은 후끈 달아올랐다.
콧등에 송송 돋아난 땀방울을 훔쳐가며 구경에 열중이던 아내와 나는 문득 딸아이가 그다지 시장 분위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아내와 난 다소 의외라고 느껴져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지난 번 태국 여행기에도 언급을 했지만 딸아이는 쇼핑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니 쇼핑이라기 보다는
상점과 상품 구경을 좋아한다. 딸아이의 말을 빌자면 물건을 사지 않고 그냥 구경만 하여도 서너시간 쯤은
즐겁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리도 전혀 아프지 않다고 한다.


짜뚜짝 시장 방문 하루 전 날 우리는 엠포리움 백화점을 포함한 방콕 시내 몇몇의 백화점을 돌아 보았다.
여행의 첫방문지를 백화점으로 한 것이다. 물론 딸아이 때문이다. 엠포리움은 개장한지 얼마 안된 새 백화점으로
방콕의 고급 백화점 중의 하나라고 알고 있다. 이를 시작으로 딸아이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 나라야, 짐톰슨,
센트랄까지 돌아보았다. 점심 시간을 뺀 6시간 이상의 강행군이었음에도 딸아이는 전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놀라운 체력을 과시하였다.
그렇다고 물건을 많이 산 것도 아니었다. 아내는 나라야 제품 몇 개와 짐톰슨의 작은
기념품 몇 개가 전부이고 딸아이는 친구들에게 준다며 손수건 몇장을 샀을 뿐이다.

그런 아이가 시장에서는 너무 일찍 지친 표정을 지었다. 딸아이에게 짜뚜짝시장은 그저 질척거리고 혼잡스럽고
후텁지근하고 깔끔하지 못한 장소인 것 같았다. 구매 욕구는커녕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한 '아이스께끼' 통 앞에서 머뭇거리며 몇 개를 사려고 하자 딸아이는 서둘러 내 팔을 잡아 끌었다.

도시에서 자란 딸아이는 시장의 분위기와 정서에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 것 같다.
아내와 내가 짜두짝 시장에서 옛 흑백 사진을 보는 듯한 훈훈한 추억의 감정에 휩싸인 것과는 정반대이다. 


우리는 실생활에서 세대차란 말을 자주 사용하고 또 느낀다. 짜뚜짝 주말시장과 백화점 엠포리움에서
딸아이와 우리 부부가 느낀 감정의 차이도 그런 세대차에 해당되는 경우일 것이다.
아내와 나는 딸아이가 시장에서 무질서와 비능률과 세련되지 못한 점만 보지 말고 다른 모습을 보아 주길 바란다.
눈 깜작할 사이에 많은 것이 변하는 속도전의 세상이긴 하지만 '낡고 오래된 것들, 시간의 이끼가 덕지덕지 낀 것들,
세월이 만든 주름살같은 것들'이 무조건 버리고 배척해야 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딸아이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서며 감정은 강요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냥 예정보다 좀더 일찍 시장을 걸어 나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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