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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태국

지난 여행기 - 2000방콕&푸켓8

by 장돌뱅이. 2017. 8. 27.

39. 마야베이1

이른 아침, 장난감 같은 플라스틱 카약을 타고 마야베이의 해변에 발을 디뎠을 때의 신비로운 느낌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가파른 좌우의 바위절벽은 밝은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실루엣만 보여 마야만에는 간밤의 어둠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갖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다는 아직 미명인 듯 검푸른 색이었고 파도도 거의 없어 정지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미지의 땅을 밟듯 어떤 경이로운 감정에 휩싸여 서로 말을 아낀 채 조심스레 해변을 걸었다.

해변에 밤새 내려있는 밀도 높은 아침의 고요를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오른쪽 바위 절벽으로 해가 솟아오르면서 왼쪽 바위산의 꼭대기부터 본래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천천히 바위 절벽을 핧으며 아래로 내려온 햇살은 바다를 비추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이제까지 검푸른 빛이던 바다는 햇빛이 닿자마자 한없이 투명한 옅은 하늘색으로 바뀌었다.
햇살은 물 밑의 설탕보다 흰 모래에까지 닿아 일렁거렸다. 마야만의 모래 빛을 닮아 온몸이 하얀 물고기가 물속의 햇살을
헤집고 다니는가 싶더니 누군가 먹물을 부어놓은 듯 시커먼 물감이 갑작스레 다가왔다간 사라졌다.
자세히 보니 무수히 많은 작고 새까만 한무리의 물고기 떼였다.

햇살이 이동하면서 마야만은 투명하고 화사한 빛으로 탈바꿈을 하였다.
그것은 한 마리 나비의 탄생처럼 화사한 빛의 향연이었다.
전원교향곡을 듣는 것보다 해돋이를 보는 것이 좋다는 드뷔시의 말은 옳았다.
적어도 이 마야베이에서는.


영화 '더 비치'의 광고 문구가 떠올랐다.
'어딘가엔 반드시 존재한다'.
진짜 이런 해변이 존재하는구나!!!
영화 내용이 치졸하여 차라리 광고 문구가 더 멋지다고 생각했었는데 직접 와서 보니
'더 비치'가 좀더 완성도 높은 훌륭한 영화여서 마야베이를 정동진 역의 '모래시계' 소나무나
'로마의 휴일'의 스페인 광장 계단 또는 '진실의 입'처럼 가서 볼 때마다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하거나
즐겁게 하는 장소로 만들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사실 쫓기던 고현정이 초조히 기차를 기다리던 장면이 없었다면 그냥 시골 역사의 흔한 소나무였을터이고
오드리 햅번이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았다면 평범한 계단이고 그레고리펙이 손을 넣지 않았다면
성당 입구의 괴상한 장식물에 불과한 것들이다.
더군다나 '진실의 입'은 고대 로마시대 때에 하수구 뚜껑으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보잘 것 없는 물건 아닌가.

닐스 보어란 학자가 덴마크에 있는 크른베르그 성을 보다가 "성은 하나의 성인데, 햄릿이 여기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성은 전혀 다른 성이 된다."고 했다는데 마야베이에 서서 이 곳이 디카프리오가 헤엄을
치던 곳이라고 회상을 해보았자 그 때문엔 어떤 감동도 살아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아름다운 해변에서 어떻게 상어를 출몰시켜 해변까지 피로 물들이는 끔직한 화면을 기획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거참......' 하는 식의 찝찝함만 되살아 났다.

누가 있어 참신한 이야기와 화면으로 가득찬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이 아름다운 마야만에 바쳤으면 좋겠다.
매일 아침 이 곳을 찾는 이의 감동이 더 할 수 있도록. 이 지상에 피피섬이 있고 살아서 그 해변에 서있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이며 축복인가. 나는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누구엔가 감사했다.


40. 마야베이2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커튼을 재치고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거짓말처럼 말짱하게 개어 있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아직 단잠에 빠져있는 식구들을 남겨둔 채 살며시 방을 빠져 나왔다.
삐죽이 솟은 회색의 야자 나무도 가볍고 경쾌해 보였다. 로달람으로 나갈까 톤사이로 나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톤사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바다에는 몇 척의 배들이 떠있었고 햇살이 왼쪽 산등성이 위에서 사선으로 비추면서
바다는 막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바다는 아침 햇살에 황금빛으로 물들어 거인의 옷자락처럼 천천히 뒤척였다.
"아침 햇빛 찬란히 동쪽 하늘 비칠 때 지난 밤 어두운 생각 어언 간에 사라지고 한량없는 희망이
다시 솟아 오르며 어부들의 흥겨운 노랫 소리 들린다."

나는 해변에 앉아 중학교 땐가 배운 노래를 흥얼거리며 햇살이 항구와 바다를 가득 채우는 모습을 바라 보았다.
나는 왜 이렇게 아침바다에 집착하는 것인지......

식구들을 깨워 아침 식사를 마치고 피피레에서의 스노클링과 카약킹을 예약을 해둔 SIAM-UK로 갔다.
목소리 허스키한 여사장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잠시 후 어제 만났던 호주 여성 미스 PIP이 나타나
오늘 우리를 안내할 것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의 이번 피피섬 일정을 확정시켜준 사람은 그녀였다.

어제 우리는 점심을 먹고 SIAM-UK를 찾았었다. 어제 오후와 오늘 오전까지의 일정을 잡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입구에 서있던 그녀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내가 '스노클링과 카약킹 투어'를 포함한
피피섬 관광 일정을 문의하자 그녀는 '오늘은 바람이 세고 파도가 높으니 배를 타고 나가는 것보다는
그냥 피피섬 안에서 휴식을 취하며 오후를 보내고 내일 아침 일찍 피피레에서 스노클링과 카약킹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는 아직 가보지 않았다면 전망대를 올라보라고 권해 주었다. 우리는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자신의 상품 판매에만 급급하지 않고 차분히 제반 여건을 설명해주는 그녀의 태도에 신뢰감이 갔다.
2년 전 피피섬에 왔을 때 배를 타고 섬 외곽은 대충 돌아보았기에 바다로 나가는 일은 내일로 미루고
섬 안쪽을 구경했던  것이다.


나중에 여사장과 일인당 720바트에 피피레의 스노클링과 카약킹 투어를 예약했다.
미스 핍은 650바트까지 깍아보라고 묻지 않은 귀뜸을 해주었지만 나의 협상 솜씨가
이번 여행동안은 영 잼병이어서 할 수 없었다.

720바트란 금액도 '며칠 전에 다녀 간 미스터 챨리(동호회 리더)의 친구'라고 고위직(?)을 사칭해 가며
1000바트에서 깍은 결과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챨리님이 만난 SIAM-UK의 사장은 내가 만난 태국 여사장이
아니라 영국인 남자 사장이었다. 그럼에도 그 여사장이 챨리님을 아는 척한 것은 남편인 영국인에게 들었거나
아니면 손님에 대한 서비스로 순발력을 발휘한 것 같았다.

이른 아침 롱테일 보트에 카약과 먹거리를 실고 피피레로 향했다. 보트 엔진의 굉음 속에 맞바람이 상쾌했다.
우리가 특별히 일찍 출발한 탓에 마야베이에 도착했을 때는 우리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카약을 타고 노를 저어 해변으로 갔다. 카약킹은 우리가 유원지에서 타는 노 젓는 보트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해변에서 돌아와 본격적으로 스노클링을 시작했다. 

산호의 색깔이 기대했던 것만큼 화려하지 않은 점이 아쉬웠지만 즐거운 유영의 시간이었다.
다이빙을 배워 저 물밑으로 내려간다면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겠지만 우리 가족은 스노클링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미스 핍이 아기 상어를 보러가자고 하여 우리는 잠시 펠레 베이로 장소를 옮겼다.
그곳에서 팔뚝만한 상어가 바위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지만 그 외엔 특별한 것이 없어 우리는 다시 마야베이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마야베이는 어느새 수많은 여행객을 태우고 온 배들로 가득 차있었고 해변 역시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고요한 아침의 신비로움이 사라진 자리를 이글거리는 햇빛 속에 벌거숭이 군상들이 채우고 있었다.
아침에 보았던 그 해변이 거기라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피피섬을 찾는 사람은 될 수 있으면 이른 아침에 마야베이를
가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여행객이라면 굳이 여러 베이를 돌아다닐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한다.
물론 여기저기가 다 아름답겠지만 사실 비슷비슷한 것도 사실이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동안 아까운 시간만 흘러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마야베이 발을 디뎠다.
그리고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까지 맑은 물 속에 몸을 담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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