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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태국

지난 여행기 - 2001방콕·푸켓·끄라비5

by 장돌뱅이. 2017. 9. 12.

5. 푸켓에서2

<행복한 까론비치 달리기>

까사브라질의 약점이라면 수영장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바다가 잔잔한 건기철이라면 적어도 그런 약점은 더 이상 약점이 아니다.
안다만이라는 끝도 없이 넓은 푸켓의 바다 수영장을 두고 무슨 다른 수영장 타령을 할 수 있겠는가.


아침 일찍 해변으로 나갔다.
이른 아침 해변을 달리는 일은 여행하는 모든 해변에서 내가 하는 아침 의식이다.
싱그럽고 상쾌하고 가벼운 느낌이 이른 아침 해변을 달리는 시간 속에 다 녹아 있다.

온더락 앞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해변을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턱에 차고 벗은 윗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을 때 나는 까론비치의 고운 모래밭에 팔을 벌리고 누웠다.
하늘이 시야에 가득했다. 숨을 고르고 그대로 바다로 뛰어 들었다.
도너츠에 묻은 설탕처럼 몸에 달라 붙은 까론 비치의 모래와 번질거리는 땀을 바다가 씻어주었다.
바닷물은 알맞게 따뜻했고 나는 세상의 행복이 거대한 어떤 것이 아니라는 걸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포만감을 나홀로 느끼는 것에 아내와 딸아이에게 미안했다.

아침을 먹고 쉬다가 다시 해변으로 나갔다.
그 사이 해변은 쨍쨍 열대의 무더운 햇빛이 장악하고 있었고 제식 훈련 대열처럼 길게 원색의 파라솔이 펼쳐져 있었다.
오전 내내 바닷물과 파라솔을 왕복하며 수영과 책읽기를 반복했다.



<카오랑은 카오랑이 좋다>


까론비치에서 푸켓 타운으로 가는 썽태우는 까사브라질 뒤쪽의 PATAKROAD에서 출발하였다.
시간이 다소 걸린다는 흠은 있었지만 특별한 일정도 없으니 느긋함과 바꾸면 되니 별문제가 아니었다.
요금은 20바트. 무엇보다 툭툭이처럼 흥정이 없이 규정 요금을 내는 것이 편안해서 좋았다.


푸켓 시내의 NEW DEEBUK ROAD에 있는 RAYA THAI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이튿날 끄라비로
가기 위해 푸켓공용터미널에서 에어컨 버스를 120바트에 예매했다.
(하지만 뒷날 배편으로 끄라비로 가게 되어 결국 이 돈은 낭비한 꼴이 되었다.)

푸켓타운을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카오랑은 모터싸이클 택시를 타고 갔다.
역시 요금은 20바트였다.
모터 싸이클 뒤에 매달려 가면서 새삼 푸켓 해변에서 영업을 하는
툭툭이들의 요금이 굉장히 비싸다는 걸 깨닫는다.
썽태우 요금이나 끄라비로 가는 버스 차비를 볼 때도 그렇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푸켓을 여행하려면 이 악동 툭툭이와 친해질 수밖에.

여행지의 '가격 보호는 자연 보호만큼 중요한 터'여서 바가지에 너그러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몇십 바트에 여행의 기분을 망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겠다.
푸켓의 아름다운 바다를 보는 세금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여행 안내서를 보면 카오랑에 대한 명칭은 여러 가지로 나온다. 랑 언덕이니 랑힐이니 하는 식인데
나는 그냥 카오랑이 좋다. 왠지 ‘랑 언덕’이니 ‘랑힐’이니 하는 것은 양복에 갓 쓴 것처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마치 이것은 한강을 ‘한리버’로 부르고 설악산을 ‘설악 마운틴’으로 부를 때와 같은 느낌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긴 하지만 까론비치나 빠똥 비치하는 식의 결합은 그래도 괜찮아 보이는데,
태국어의 억양과 단어 속에 숨은 맛을 느낄 수 없어도 카오랑만은 카오랑이라고 불러야 아름답게 들린다.
폐쇄적인 한글 전용이나 막연한 영어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큰 의미 전달의 문제가
없는 것이라면 간단한 지명은 현지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좋아 보인다.

카오랑의 꼭대기에는 몇 개의 벤치와 매점 그리고 퉁가 카페가 있었다.
꼭대기와 퉁가카페에서는 푸켓 시내와 앞바다가 멀리 내려다 보였다.
나는 50바트 짜리 냉커피를 시키고 마지막 썽태우가 출발한다는 오후 다섯시에 맞춰 일어날 때까지
퉁가에서 푸켓 시내를 내려다보며 책을 읽었다.

카오랑에서 내려오는 길에 만난 태국인들의 친절을 기억하고 싶다.
멍청하게도 카오랑을 올라가는 생각만 하고 내려오는 생각은 하지 않아 퉁가카페에서 나오자
푸켓 시내로 내려갈 방도가 없었다. 주차장에는 몇 대의 모터 싸이클이 주차해 있었지만
모두 다른 사람들이 대기 시켜 놓은 것이었다.

무작정 나처럼 준비성 없는 다른 사람을 기다릴 수만도 없어서 나는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썽태우 출발시간에는 맞출 수 없을 것 같아 마음 속으로는 이미 포기를 하였다.
내려가는 도중 모터싸이클에 가족을 태우고 내려가는 두세 명의 태국인을 만났다.
그런데 나와 눈이 마주친 그들은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같이 타겠는냐고 물어왔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손짓몸짓으로 그들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싸이클이 작고 부인과 아이를 동승하여 내가 탈 공간이 없어 보였는데도
그들은 수줍게 웃으며 타라고 권해왔다.

끝내 고사를 하고 내려가는데 이번엔 작은 아이 하나만 태운 사람이 내 앞에 모터사이클을 세웠다.
그리고 자리를 비워주었다. 덕분에 마지막 썽태우를 탈 수 있었다. 카오랑을 내려와 그에게 사례를
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막무가내로 거절을 하였다.
나는 100바트를 크고 맑은 눈망울을 가진 그의 아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얼마 안되지만 이거 아저씨 성의니까 과자 사먹어. 고마워. 콥쿤마캅”
사랑이 섞인 말은 생경한 언어로 말해도 통한다는 말을 믿고 나는 천천히 한국말로 해주었다.


<식당 THE CLIFF>

까사브라질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해리포터를 읽다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벌써 시간이 8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저녁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를 하며 푸켓 안내서를 뒤지다 식당 THE CLIFF의 광고를 보았다.
내일이면 푸켓을 떠나니 쾌적한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사치를 부려보고 싶었다.
식사 후에는 까사브라질에서 맥주를 마시며 주인 내외와 시간을 보내면 좋을 것 같았다.


클리프에서의 저녁은 만족스러웠다. 예약을 하지 않고 갔음에도 입구부터 매니저인
MR MIKE INMAN의 정중한 안내를 받았고 식당의 분위기도 기대했던 대로 쾌적하였다.
까론비치의 불빛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식당의 위치도 좋았다.
저녁에 일찍 왔으면 노을과 해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식당에서 제일 중요한 음식의 질과 맛도 훌륭했다.
음식을 고를 때와 음식이 나온 뒤에도 주방장의 친절한 설명이 있었다.
한마디로 식당에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모든 과정이 부드러운 바람 같았다.

부족한 단 한가지는 아내와 딸아이의 부재였다.
그러나 그것은 THE CLIFF의 책임이 아니었다.
소설가 황석영이 쓴 적이 있다.


“무엇보다 음식은 사람끼리의 관계이며, 시간에 얽힌 기억의 촉매들이다.
맛있는 음식에는 노동의 땀과, 나누어 먹는 즐거움의 활기, 오래 살던 땅,
죽을 때까지 함께 사는 식구, 낯설고 이질적인 것과의 화해와 만남,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며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궁핍과 모자람의
조건이 들어 있으며, 그것이 맛의 기억을 최상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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