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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태국

지난 여행기 - 2002(2월)방콕3

by 장돌뱅이. 2017. 9. 15.

3. 쇼핑이야기

딸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적 얘기다.
이튿날 산행을 위해 짐을 꾸리는데 갑자기 딸아이가 자기도 같이 가겠다고 했다.
아직 어린 딸아이에게 1,200미터가 넘는 산은 무리일 것 같아 만류를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절대 다리 아프다는 말하지 않기, 아빠 등에 업힌다는 말하지 않기, 등등
다짐에 다짐을 받고 다음날 아침 딸아이와 나는 길을 나섰다.

(그런 다짐을 100% 믿은 건 아니지만) 아직 경사진 길을 오르기 전인 산 초입에서 겨우
10여 분을 걷고부터
딸아이가 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빠, 다리는 아프지 않은데 이상하게 졸립다. 졸려서 걷기가 힘들다."
절대 '다리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약속을 어긴 건 아니었다.
등에 업히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절묘한 이유였다. 웃음이 나왔다.

예상보다 빠른 칭얼거림이었다. 아직 산길은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같이 간 일행들의 산행을 망칠까봐 나는 배낭을 앞으로 메고 딸아이를 업을 수 밖에 없었다.
휴식이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동료들에게 앞서 가라고 하고
나는 쉴 때마다 딸아이를 설득시키기 시작 했다.


"모든 산에는 게으름뱅이 언덕이 있지. 남에게 의지하거나 중간에서 포기를 하면
게으름뱅이가 되는거지. 우리 딸도 게으름뱅이가 되고 싶나?"‘
"게으름뱅이 언덕?"
게으름뱅이란 말에 딸아이는 관심을 보였다.
"우리가 힘들다고 느끼는 곳이 바로 그 게으름뱅이 언덕이 있기 때문이야.
거기에 져서 포기하거나 남에게 도움을 청하면 게으름뱅이가 되는 거야."
그 말때문인지 딸아이는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소가 된 게으름뱅이"란 동화를 읽고
밥 먹고나서 절대로 자리에 눕지 않던 순진무구의 어린애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뒤로도 가끔씩 내가 업어 주었지만 한결 편하게 예정된 산행을 마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언덕’ 덕분에 그 뒤로도 여러 산을 함께 오를 수 있었다.
실제로 그런 언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딸아이가 알게 되기 전까지는.

산행 덕분인지 초등학교 시절에는 육상부에까지 선발되기도 했었으나
요즈음은 가급적 걷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아내도 마찬가지이다.
기초체력에서 딸아이보다 처지는 아내는 가끔씩 산에 오를 때면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기 전부터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
그 때문에 우리에겐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온 산이 꽤 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다. 백화점이나 시장에서 쇼핑을 할 때 아내와 딸아이는 걷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체력 역시 월드컵 4강 신화의 태극전사보다 막강해진다.
서너 시간 쯤 쉬지 않고 각층을 오르내리는 것은 예사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마시라. 서너 시간동안 쉬지 않고 물건을 산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냥 보고 만지고 비교해보고 감탄하고 모녀간에 쉬지 않고 얘기를 하면서
 ’창문사기(WINDOW SHOPPING)'를 계속하는 것이다.
나중에 손에 들고 나오는 물건은 서너 시간을 투자해서 샀다하기에는 너무 작은 기념품이나
친구들에게 나눠줄 선물 몇 개가 전부일 뿐이다.


이상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대단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직 축구와 등산에 있어
보통 사람 정도의 평균 체력은 보유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쇼핑을 하는
아내와 딸아이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불과 30분 정도가 지나면서부터 슬슬 다리와 허리와 어깨 등이 아파오기 시작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온몸이 꽈배기처럼 뒤틀려오기까지 한다.

아뭏튼 이 날 하루종일 나는 지리산 종주보다 힘든 엠포리움 백화점 전층 순례를 따라다녔다.
마침내 밖으로 나와서 숙소로 가다가 아내와 딸아이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청천벽력의 말을 꺼냈다.
“아까 거기 다시 가서 그걸 그냥 살까?”
“어딜 또 간단 말이야?” 나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잠깐이면 돼. "와코루"에.” 아내와 딸아이는 지친 기색이 없는 기운찬 목소리였다.
“갔다 와! 갔다 와! 난 여기서 기다릴 께.” 나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때 딸아이가 내 곁에 같이 앉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빠, 방콕에선 백화점마다 게으름뱅이 층이 있는데 중도에서 포기를 하면
게으름뱅이가 되는 전설이 있대. 게으름뱅이 아빠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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