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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태국

지난 여행기 - 2003방콕·푸켓1

by 장돌뱅이. 2017. 9. 21.

1. 어떤 방콕 택시
수쿰윗 로드에서 공항가는 길은 90년대 초반 이래 수십 차례의 방콕 출장동안 가장 눈익은 길이다.
택시가 스쿰윗을 벗어나면서 공항으로 가는 EXPRESS WAY로 접어 들지 않았을 때 단호하게 차를
세우고 내려서 다른 차로 갈아타야 했다.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지나치고 나서야 문득 운전사에게 왜 공항 쪽으로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주 서툰 영어와 태국어를 섞어가며 이리로 가도 된다고 ‘SAME! SAME!’을 반복하며
‘마이펜라이’(괜찮다)를 연속해서 덧붙였다.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하며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천공항이야 외길이지만 김포공항 가는 길은 강변북로로 가도 되고
올림픽대로를 타고 가도 되지 않는가. 비행기 도착시간까지는 시간도 넉넉하여 설혹 조금
돌아간다하더라도 그리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건 아니었다.
차는 터무니없게도 위만멕 궁전 앞을 지나는가 했더니 강을 건넜다.
이쯤 되니 기사의 의도는 명백해졌다.

택시를 잡아 돈무앙 에어포트를 가자고 말해놓고 몸을 뒷좌석 의자에 깊숙이 묻은 채
다른 생각에만 골똘했던 탓에 태국인 택시 기사는 나를 방콕이 초행길인 ‘호구’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공항까지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내게 바가지요금을 씌우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정도가 심한 편이었다. 그는 처음엔 조금이라도 알아먹는 듯하던 영어도
점차 전혀 못알아 듣는 양 무조건 ‘마이펜라이’만 반복했다. 그의 태국어와 나의 영어가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주장으로만 오고가는 동안 차는 어느 덧 어둑한 외진 길을 달리고 있었다.
내가 내린다해도 다른 차를 잡기는 힘들어 보였다.
나는 별로 유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와 언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바가지 요금보다 내가 걱정했던 것은 가족들의 도착 시간이었다.
방콕에 먼저 출장을 와서 업무를 마친 날, 아내와 딸아이가 처제까지 동행하여 오기로 했던 것이다.
도착시간에 맞추어 내가 방콕공항으로 마중을 나가기로 했던 터라 조바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만에 하나 만나지 못하는 불상사에 대비하여 시나리오를 미리 준비해 두었으니 
방콕이 초행길이 아닌 아내와 딸아이는 별일 없이 호텔로 올 수 있겠지만 여행을 떠나온 식구들에게
잠시라도 걱정을 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정시에 공항에 가 있고 싶었다.
택시는 내가 10년 가까이 출장을 다니면서도 한번도 지나치지 않은 낯선 '공항길'을 더듬듯이 돌고 돌았다.
문득 먼 곳에 직선으로 차들이 달리는 고속도로를 발견하여 무조건 그리로 가라고
손으로 가리키며 인상을 쓴 끝에야  겨우 제대로 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실랑이 끝에 공항에 도착하니 요금은 통상적인 경우보다 3배가 넘게 나왔다.
괘씸한 생각에 공항의 경찰을 불러 시시비비를 가려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미 가족을 태운 비행기의 도착 시간이 지나있어서 지체할 틈이 없었다.
서둘러 도착 홀에 달려가자마자 때맞춰 아내와 딸아이가 환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가족들의 입국 수속을 지연 시켜준 수 많은 여행객들이 고맙게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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