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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85 - 김용택의「나는 조각배」

by 장돌뱅이. 2018. 11. 20.

직장을 그만둔지 2년이 되었는데 시간이 무겁지 않게 흐른다.
직장 다닐 때에 비해 특별히 책을 많이 읽거나 여행을 더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하루하루가 잘 지나간다. 
완전 백수 체질인 것 같다.

물론 산다는 게 무슨 일이건 생기기 마련이어서  내가 백수가 안 되었으면
이런 일을 다 누가 처리했을까 싶게 늘 이런저런 일이 꼬리를 물긴 한다.

그래도 9시에서 6시까지라는 규정된 일과가 없으니 많은 시간을 아내와 보내는 게 좋다.

얼마 전 친구들과 모임을 끝내고 돌아온 아내가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백수 남편을 여자들이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뭐라고 하는데?"
"젖은 낙엽. 킥킥킥. 부인한테 달라붙어 잘 안 떨어지니까."
나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심상히 대꾸했다.
"그래? 하지만 뭐 난 백수 이전부터 당신에게만 붙어 있는 젖은 낙엽이었잖아."
(아무래도 난 생존 내공까지 터득한 '고수 백수'가 되었나 보다.)

가을비가 제법 요란하게 내리면서 마른 나뭇잎을 떨구었다.
곧 동장군이 다가온다는 신호이리라.
차 유리에 붙은 '젖은 낙엽'을 휴대전화롤 찍어 아내에게 보여주며 또 한번 킥킥거렸다.
'9시에서 6시까지'가 아닌 0시에서 24시까지로 불어난 '젖은 낙엽'의 넉넉한 시간을 
"몸에 실린 짐들을 하나둘 몸 밖으로" 던지며 
아내와 꽁냥꽁냥 보내고 싶다.


집에서 놉니다
노니, 좋습니다
아파트 정원에 산딸나무 꽃이 피었습니다.
희고 고운 꽃잎들이 초록의 나뭇잎 위에
십자 모양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피었습니다
초여름꽃은 흰 꽃들이 많답니다. 이팝나무 꽃, 층층나무 꽃,
때죽나무 꽃, 때죽나무 꽃은 대롱대롱 매달려 피지요.
꽃술 끝이 노란 그 꽃들도 희고 곱답니다. 꽃이 질 때
그것들을 오래오래 바라보면
내 몸에 실린 짐들을 하나둘 몸 밖으로 던지는 꿈을 꿉니다.
마음의 짐을 다 내려놓으면 눈이 저절로 감깁니다.
눈이 감기면 내 몸은 빈 배가 되어
어느 먼 곳으로 기우뚱기우뚱 떠갑니다.
한없이, 한이 없이, 좋습니다. 순순한 바다,
먼 수평선 너머로 나는 나를 놓고 깜박 꺼져서.

그래요.
그렇게 당신의 흰 발꿈치에 가만히 가닿고 싶은
나는
한 조각
빈 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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