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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잘 먹고 잘 살자 60 - 해물잡채

by 장돌뱅이. 2019. 10. 26.


*위 사진 : 음식디미방』으로 재현한 잡채(황광해 사진) 
             

기록상 잡채(雜菜)라는 음식이 등장한 것은 오래 되었다. 1630년 신흠(申欽)이라는 사람이 쓴 글에금에게
잡채나 침채(오늘 날 김치), 더덕(沙蔘) 등을 바치고 높은 벼슬을 얻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이를 두고
'잡채상서(雜菜尙書)'니 '침채정승(沈菜政丞)'이니 사삼각노(沙蔘閣老)’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음식으로 벼슬을 얻었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임금이 반정으로 물러난 광해군이고 보면
반정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앞선 권력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들어간
기록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런 문제의 진위 여부 상관없이 약 400년 전에 잡채라는 음식이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다만 당시의 잡채는 요즈음 우리가 보는 잡채와는 다른
,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채소 모둠이었다.
1670년경 안동 장씨 할머니(張桂香)가 일흔이 넘어  쓴 최초의 한글 요리책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이 있다.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란 뜻이겠다. 이 책에 잡채 조리법이 나온다. 그러나 당면 이야기는 없고
오이채, , 댓 무, 참 버섯, 석이버섯, 표고버섯, 송이버섯, 녹두 질금, 도라지, 거여목, 마른 박고지, 냉이, 미나리,
, 두릅, 고사리, 시금치, 동아, 가지와 꿩고기 등이 재료로 들어간다고 했다.
구할 수 있는 여러 채소를 넣어 만들면 잡채였던 것이다.

음식디미방』 이후 18세기 쓰여진 『음식보(飮食譜)』나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 19세기 초중반의
 『
규곤요람(閨壼要覽) 』등에도 잡채 만드는 법이 수록되어 있지만 당면은 나오지 않는다.

당면(唐麵)이 들어간 잡채는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요리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과 
『조선요리제법 朝鮮料理製法 』에 비로소 등장한다. 녹말가루로 만든 당면은 1910년대에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하니
대략 그 시기가 일치하는 것이다.
 

중국의 당면과 일본 간장이 우리의 전통 잡채와 만나 본래의 의미를 바꾸어버린 것이다.
음식평론가 황광해씨는 이런 글을 남겼다.


당면은 일본인들이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간장과 더불어 잡채에 스며든다
. ‘당면잡채. 궁중음식도, 우리 음식도 아니다.
나라가 망하고 난 후에 들어온 식재료, 당면이 주인 노릇을 하는 당면잡채는 한식의 아름다움을 살린 음식은 아니다.
채소 맛으로 먹어야 할 잡채가 당면과 조미료, 감미료 범벅의 간장 맛으로 먹는 음식이 되었다.


그러나 당면잡채가 '한식의 아름다움을 살린 음식이 아니'라고 해서 평가절하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통 잡채는 잡채대로 보존하고 당면잡채는 당면잡채 대로 살려나가면 되는 것이다.
'섞임'은 모든 문화의 본성이다. 섞인 이후의 새로운 모습은 또다른 문화의 원조가 되고 전통이 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남긴 잔재의 청산은 역사적 과제이지만 당면잡채라는 맛좋은 '퓨전'까지 굳이 버려야할 이유는 없다. 




당면잡채는 당면을 기본으로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고기잡채, 콩나물잡채, 고추잡채, 부추잡채 , 청포묵잡채,
표고버섯잡채 등으로 다양하게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노노스쿨에서 조리시간에 해물잡채를 배웠다. 당면에 파프리카와 피망, 새우와 오징어를 넣은 잡채이다.
사정이 있어 강의만 듣고 실습을 하지 못했기에 집에 와서 만들어 저녁으로 먹었다.
그동안 고기를 넣은 '전통(?)' 잡채는 아내의 주요 메뉴 중의 하나였다.
딸아이와 나는 아내의 먹을 때마다 '우주 최고의 잡채'라고 엄지를 세우곤 했다.  
아내는 나의 해물잡채를 먹으며 그 엄지를 내게 돌려주었다.
나는 '그럴리가···' 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잠시 '춤추는 고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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