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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성북동 걷기

by 장돌뱅이. 2020. 5. 15.



석 달 만에 지하철을 탔다. 
그동안 여행은커녕 외출조차 최소한으로 자제하며 지냈고 꼭 멀리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직접 운전을 해야 했다.

다시 말하기도 지겹지만, 최근에 겪은 모든 비정상적인 상황은 그놈의 코로나 때문이다.
덕분에 손자친구를 자주 볼 수 있던 것은 즐거웠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는 점에서 둘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야니님과 아니카님을 만나서 낙산성곽길을 걸었다.
길은 적당한 오르막과 내리막이어서 편안했고 투명한 공기는 언덕을 오를수록 우리의 시야를 먼 곳까지 틔워주었다.
"노동처럼 유익하고 예술처럼 고상하고 신앙처럼 아름다운" 산행을 꿈꾼다는 산악인이 있었던가.
이 수식어를 걷기에 가져와도 어색할 리 없겠다.
더군다나 화사한 햇살 싱그러운 바람 속을 '유익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걷는 것이라면. 



칼국수로 점심을 하고 한성대입구역에서 성북동 길을 따라 걸으며 최순우 옛집과 한용운이 살던 심우장, 
그리고 상허 이태준이 살던 집을 둘러보았다. 상허의 집은 현재 수연산방이란 이름의 분위기 있는 찻집이 되어 있다.  
"성은 하나의 성인데, 햄릿이 여기 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성은 전혀 다른 성이 된다"고 했다.
성북동의 세 집도 그랬다. 
지난 어느 시간 '그'가 앉아서 책을 읽었을 방과 손수 심은 향나무, 그리고 소설을 썼을 작은 방.
시간을 타고 오는 상상은 우리가 여행을 하는(이날의 걷기를 짧은 여행이라고 하자) 한 이유일 것이다.

찾아가는
집마다 툇마루에 앉아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듣고, 
흔들리는 초록의 잎과당을 가득 채운 햇볕을 바라보며 해찰을 부렸다.


 
야니님과 아니카님처럼 삶의 전환을 이루는 단호한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부럽다.
늘 한 발을 안전한 곳에 담근 채 남은 만큼의 삶만 고민하며 살아온 나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단이 갑작스러운 내지름이 아니라 오랜 생각과 계획 끝에 도달한 결론이기에 더욱더 그렇다.
남들보다 조금 빠른 자발적 퇴직과 또 다른 삶의 설계 - 그곳에 늘  오월의 훈풍 같은 행운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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