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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싱가포르

2007 싱가폴 첫째날1 - 싱가폴

by 장돌뱅이. 2012. 4. 25.

2000년 가을 대만 장카이섹 국제공항에서 항공기 추락으로 70여명이 숨지는 참사가 있기까지
SQ는 창사 이후 무려 28년동안 단 한건의 인명사고도 없는 무사고 기록을 세웠다.
또한 1997년 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 대다수의 아시아 항공사들이 고전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흑자 행진을 계속하여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다. 2000회계년도 중 운항수입은 23억 달러에
이익은 무려 14억 65천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다른 항공사와는 달리 자국의 국내선 운행을 통한
이윤 창출을 기대할 수 없고 오로지 국제선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 사정이므로 이런 실적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전문 기관의 조사와 승객들의 투표에서 여러번 최고의 항공사로 뽑힐 만큼 SQ는 훌륭한 기내 서비스와 안전 운행의
확실한 보장으로 정평이 나있다. SQ는 남들이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내와 내게 싱가폴 하면 뭔가 짜임새 있고 안정된 인상을 떠오르게 된다.
그것은 10년 전 우리 가족이 싱가폴을 처음 여행하였을 때 보았던 공원처럼 깨끗한 거리도 그렇고.
그보다 앞선 80년대에  내가 울산에서 회사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한 싱가폴 사람에 대한 기억도 그렇다.

그는 싱가폴의 유명 해운해사에 근무했던 직원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한국으로 장기 출장을 와있던 그는 회사에서 베푸는 일체의 접대와 선물을
거절하는 강직함과 늘 아내와 가족을 생각하는 따뜻함을 보여주어 나를 감동시켰다.
그것은 당시 내가 근무했던 회사를 다녀가는 내외국인을 막론한 숱한 손님들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업무를 떠나 그와 인간적으로 가까워졌던 것은 그와 내가 같은 나이라는
우연 때문만이 아니었다. 급기야 나는 단칸 전세방의 우리집으로 스스럼 없이
그를 초대했고 아내는 그를 위해 단출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한국음식들을 준비했다.
어린 딸아이도 그를 잘 따라 휴일이면 우리는 함께 경주 등의 울산 근교를 놀러 다녔다.

망고와 람부탄 등의 열대과일을 처음 맛본 것은 그의 덕분이었다.
출장이 반복되자 내가 한국 여러 문화를 그에게 소개하듯
그 역시 한국에는 없고 싱가폴에는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길거리에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너무 많고
크다는 것을 나에게 일깨워준 사람도 그였다.

“왜 당신네 한국사람들은 경음기를 이렇게 많이 사용하는 거지?”

그가 일깨워주자마자 그때까지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다녔던 거리가
온통 자동차 경적 소리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놀랍고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내가 이런 소음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었다니!
(요즈음은 많이 좋아졌지만 80년대 우리나라 거리는 요즈음
중국의 어느 거리처럼 자동차 경적으로 가득했다.)


*위 사진 : 싱가폴 창이공항을 나오며

그에 대한 기억 중에 잊혀지지 않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절정기에 올라 있던 87년 6월 그는 우리나라에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좋아하는 삼계탕을 먹기로 하고 함께 길거리를 걷다가 중무장한
전투경찰을 보았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크게 놀랐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는 ‘NORTH KOREA’와의 비상상황이 발생한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너도 이 기회에 민주쟁취를 위한 우리 국민의 투쟁대열에 합류하여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는 전혀 농담을 받을 기색이 아니었다.
(하긴 나도 그런 말을 농담처럼 던질 기분은 아니었다. 그럴 만큼 당시에 우리 사회는
팽팽한 긴장감과 뜨거운 열정이 공존하고 있었다.)

보호구를 착용하고 방패와 곤봉을 든, 마치 공상영화 속의 로봇 같은 전투경찰의
모습을 긴장된 시선으로 잠시 바라보던 그는 숙소인 호텔로 서둘러 돌아가자고
나를 끌었다. 그의 팔에 이끌려 돌아서던 우리보다 먼저 매캐한 최류탄의 냄새가
앞질러나가기 시작했다.

80년대 내내 우리는 날만 새면 볼 수 있는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그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긴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가 지적을 한 뒤에야 경음기의 소음을 자각했듯 나는 그의 놀람을 통해 우리의
현실뿐만 아니라 거기에 무덤덤한 우리의 감정 역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때로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나와 우리나라의 많은 것을 이해했지만 자신의 나라에서 신문을 통해 보았던,
분신자살의 극한 방법까지 사용해야 했던, 당시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동일한 크기의 절망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그에 대한 기억에 더하여 싱가폴 창이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나뭇가지로  터널을 이룬 울창한 가로수로 싱가폴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무가 동굴을 이루었다고? 나의 기억은 아내에 비해 늘 구체성이 부족하다.
출장으로 아내보다 훨씬 더 많이 싱가폴을 다녀갔지만
나는 그저 도시 곳곳에 있는 나무와 숲을 막연히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10년만의 싱가폴행.
아내의 말대로 '나무동굴'이 거기 있었다.
좋은 사람과 초록의 숲.
공통점이 있는 것 같은 그 기억과 현실 속을 달려
우리는 싱가폴의 시내로 들어갔다.


*2007년 추석 무렵의 싱가폴 여행에 대한 지각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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