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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어떤 맨유 팬에 관한 기억

by 장돌뱅이. 2021. 1. 8.

*맨유와 맨시티의 카라바오(CARABAO)컵 준결승전(출처 : 맨유 홈페이지)


2019년 12월 아내와 베트남 호찌민을 여행하던 중 우연히 한 맨유 팬을 만났다.

잠시 쉬면서 맥주나 한잔 할까 하고 들어간 호텔 라운지에서였다.
반쯤 남은 위스키병과 술잔을 앞 탁자에 놓은 채로 그는 좀 취해 있었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이모부처럼 개구진 인상이었다.

가벼운 눈인사로 일별을  나누자 그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자기는 영국에서 왔다고 했다. 그것으로 끝난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가 또 물었다. 

"축구를 좋아하느냐?"
그렇다고 하자 이번에는 EPL(England Premier League)에서 어느 팀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예전에는 박지성이 있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좋아했고..."
내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맞았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반갑다 반가워!!!!"
마치 이국에서 십년지기라도 만난 양 나를 얼싸안을 기세였다.
내가 끝내지 못한 말은 '지금은 손흥민의 토트넘을 좋아한다'였다.
취한 그는 앞부분만 듣고 나를 맨유 팬으로 지레짐작한 것이다.
(사실 박지성 이전에 퍼거슨 감독과 웨인 루니,  호날두가 있을 때부터
맨유를 좋아했으니 틀린 속단만은 아니다.)

그는 맨유의 자랑을 한껏 늘어놓았다.
자기가 신고 있는 빨간 양말도 맨유의 상징이라며 발을 들어 보였다.
같이 맨체스터에 지역 연고를 두고 있는 맞수 MAN CITY를  비꼬기도 했다.

"WE HAVE TO BE UNITED, MANCHESTER UNITED!,
NOT 'SHIT', NOT MANCHESTER 'SHIT'(CITY)"

'CITY'를 일부러 'SHIT'라고 발음하며 몸을 비틀어 손가락으로 자기 엉덩이를 가리켰다.
주변 사람들이 웃음으로 호응을 하자 그의 사설은 계속되었고 목청과 동작은 점점 커졌다.


"WE ARE 'UNITED', NOT 'SHIT'."
"NEVER EVER 'MAN SHIT'!" 

잠깐이지만 축구가 만들어 준  정서적 공감(?)의 시간이었다.
나는 K리그의 FC서울을 좋아하지만 그만큼 열정적이지는 않아서 그의 행동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에게 맨유는 중요한 생활의 일부인 것 같았다.

어제(7일) 새벽에 맨유와 맨시티의 카라바오컵 4강전이 있었다.

결과는 맨시티의 2:0 승리였다. 뉴스를 보며 그 사내를 떠올렸다.
'지금은 어쩌고 있을까?' 
하필이면 맨시티에 당한 패배라 더 흥분하여 위스키를 들이켜며 또다시
'맨 시티'에게, 아니 '맨 SHIT'에게 악담을 퍼붓고 있을까?


요즈음 손흥민 선수의 활약을 보는 즐거움에 주말이 기다려진다.
맨시티보다 하루 전 토트넘은 결승에 선착했다. 손흥민 선수의 골도 있었다.

토트넘과 맨시티의 카라바오컵 결승전은 4월 26일(한국시간) 새벽에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우중충한 흑백사진들로 채워진 앨범에 삽입된

발랄한 총천연색.
우울한 하루의 커튼 뒤에 펼쳐지는 생생한 풍경.
고통을 잠재우는 마약이다.

- 최영미, 「축구는 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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