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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코로나 시대에 설날 보내기

by 장돌뱅이. 2021. 2. 12.

책과 영화 속 『82년생 김지영』은  친정어머니로 빙의를 해서 시어머니에게 갑자기 속말을 털어놓는다. 
시가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이다.
"사부인도 명절에 딸 보니 반가우시죠? 제 딸도 보내주셔야죠.
시누이 상까지 다 봐주고 보내시니 우리 지영이는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영화와 책 『B급 며느리』속 김진영은 한걸음 더 나간다.
아예 명절(제사였던가?)에 시집에 가지 않는다.
'원래 그런 것'이라 거나 '누구나 다 하는 것'이라는 논리에 당당히 맞선다.

"시댁 가면 저는 손님입니다. 손님 대접을 해주세요."
"제사에 며느리가 꼭 가야 되는 거야? 오빠 할아버지잖아?"
"도대체 며느리가 무엇이길래 반대로 시부모님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주고받는 것일까?"
"오빠는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하면서 나를 다시 그렇게 만들고 있어. 나는 거부할 거야."

『B급 며느리』는 픽션이 아니라 남편이 찍은(쓴) 넌픽션이다. 김진영은 말한다.   
"고작 이 정도 영화를 보고 후련함을 느꼈다는 반응을 보면 너무 슬퍼요.
여자들이 도대체 얼마나 숨죽이며 살았단 건지"

우리 집안도 금년 설에는 큰집에 모이지 않기로 했다. 코로나 때문이다. 
명절이나 제사에 아내는 전 부치는 담당이다.
생선전을 좋아하는 아내는 그때만은 기름 냄새에 지쳐 도리질을 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준비하는 음식의 종류와 양도 줄어들었고, 
'짬밥'이 쌓이면서 전 부치기에서 손을 떼도 되는 '군번'이 되었지만,
아내는 습관적으로 그 일을 놓지 않는다.

큰집에 이어 딸아이네와도 오고 가는 일을 안 하기로 했다.
평상시에는 육아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아내와 내가 갔지만 이번 명절치레는 건너뛰기로 한 것이다.
백년손님 사위 취향을 고려한 음식을 만들 필요도 없어졌다.

아무튼 결혼을 한 지 38년 만에 아내는 '노동' 없는 명절을 보내게 되었다.
많은 책과 영화로 고통을 호소해도 별다른 변화 없이 지탱해온 세상 며느리들의 명절 노동을
그놈의 바이러스가 합법적으로(?) 해방시켜 준 것이다.
코로나가 끝나도 오랜 전통이라는 '명절 며느리 노동'이 일거에 무색해지지는 않겠지만,
'원래 그런 것'이라 거나 '누구나 다 하는 것'이라는 논리는 조금 흔들리게 되지 않을까?
인간은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 바꾸는데 자주 그리고 너무 인색하다.

아내에게 명절 기간 동안 매일 새로운 메뉴를 밥상에 올리겠다고 선언을 하고 책과 인터넷을 뒤졌다.
내게 음식은 상대가 있어야 만드는 것이다. 음식에는 나눔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식탁에 올리고 첫술을 뜬 아내의 평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오붓하다.
'남자의 앞치마는 세계 평화를 앞당긴다'는 말은 진리다.
나 역시 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오래 걸렸다. 


설날의 첫 음식은 아내와 함께 만든 떡국이었다. 나는 노랗고 흰색의 달걀지단을 부쳤다.
설날은 천지만물이 새로 시작되는 날이라 엄숙·청결의 의미로 깨끗한 흰색의 떡을 끓여 먹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만두를 넣고 떡만둣국으로 만들었다. 내가 떡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계셨다면 '그것도 핏줄 내림'이라고 혀를 차셨을 것이다.
생전의 아버지도 형도 모두 떡국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이제는 예전보다 좋아하게 된 떡국을 꼭꼭 씹어 먹었다.


떡국을 먹고 손자친구로부터 영상 세배를 받았다.

새해에도 더 신나게 놀자고 덕담을 건넸다. 친구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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