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

아내와 나 사이

by 장돌뱅이. 2021. 1. 29.




최근에 간단한 마술(
魔術) 강좌를 수강하고 있다.
강의 첫날 강사는 수강 동기를 곁들인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수강생들은 저마다 각양각색의 강좌 선택 이유를 말했다.
"강의를 하고 있는데 강의를 시작할 때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아이스브레이킹으로 활용하려고."
"모임에서 써먹으려고."
"평소에 마술에 관심이 있어서······", 등등.
나는 '손자저하'의 감탄과 호기심을 끌어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때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한 수강생이 차분히 말했다.
"치매가 진행 중인 아내에게 재미와 웃음을 주려고 신청했습니다.
가슴이 뭉클했다. 나에게 말을 전해 들은 아내도 그렇다고 했다. 

예전에 보았던 캐나다 영화 『AWAY FROM HER』를 다시 찾아보게 된 건 그 일 때문이었다.
영화 속 그랜드와 피오나는 44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한 부부다. 어느 날부터 부인 피오나에게 치매 증상이 나타난다.
와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거나 프라이팬을 냉장고에 넣기도 한다.
편지와 우체통을 연결하지 못하고 극장에 불이 난 걸 처음 발견했을 때 어떤 행동을 할 거냐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
20년을 살아온 집으로 돌아오는 길조차 잃어버리고 헤맨다. 마침내 피오나는 요양 시설에 들어갈 결심을 굳힌다.
동의를 하지 않는 남편을 피오나는 담담하게 설득시킨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건 품위야."

요양원에서는 남편에게 부인이 시설에 적응하기 위해 한 달 동안은 전화는 물론 방문을 하지 말아 달라고 주문한다.
한 달 뒤 그랜트가 요양원을 찾았을 때 피오나는 남편을 낯선 사람으로 여겨 예의를 갖춰 대한다.
대신 같이 입원해 있는 다른 남자에게 살가운 감정을 보낸다..
남자의 카드 게임을 지켜보고 입원 전에 남편과 그랬던 것처럼 함께 이야기하고 산책을 한다.
그랜트는 아내의 기억을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상태의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이생진,
아내와 나 사이」-

치매는 "큰 집에서 하나씩 하나씩 전등을 꺼버리는 전기 차단기와 같다"고 한다. 모든 '전등이 꺼져 깊은 어둠에 잠길' 때까지, 
서로 모르는 사이가/서로 알아가며 살다가/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에 이르기까지, 
'아내와 나 사이'에 대한 무엇(품위?, 예의?, 사랑?)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현실과 영화와 시에서 그들을 본다. 
아직 기억이 생생한 일상 속에서 그 뭉클한 '무엇'을 아내에게 흉내라도 내며 살아야겠다.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자체'의 입춘축  (0) 2021.02.05
2021년 1월의 식탁  (0) 2021.02.04
'시시한' 약자들의 싸움  (0) 2021.01.27
그들의 선택  (0) 2021.01.21
너를 꼬옥 안으면  (0) 2021.01.1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