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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시시한' 약자들의 싸움

by 장돌뱅이. 2021. 1. 27.

설을 원전(原典)으로 한 드라마(영화)들이 많이 있다. 
책을 그대로 옮기는 드라마도 있고, 일부만을 옮기는 드라마도 있다. 
또 소설을 재해석하여 전혀 새로운 드라마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느 경우나 소설은 소설이고 드라마는 드라마다. 
성공한 원전 소설이 드라마의 완성도를 보장해주는 담보가 아니고 
드라마 또한 소설에서 파생된 종속 산물이 아닌 독립적인 별개의 장르이다.

감상의 방식도 다르다.
소설은 읽는 속도를 내가 조절할 수 있고 이해가 미진했던 부분은 책장을 뒤로 넘겨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반면,
드라마는 원래 정해진 속도를 따라가며 감상하는 
불가역의 일회성이다.
(물론 요즈음이야 몇 번이고 뒤로 돌아가 다시보기가 가능하긴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넷플릭스에서 본 『보건 교사 안은영』은 
내겐 다소 아쉬움이 있는 드라마였다. 
무엇보다 기발한 화면 구성에 비해 이야기가 난해했다. 난해함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확실한 결론을 지어주기 보다 질문의 여운을 남기는 소설이나 드라마도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난해함이 드라마의 주제나 함축된 대사에서 오지 않고 혼란스러운 이야기 전개에서 왔다는 점이다.

특히 1, 2회는(총 6회 중) 뭐지? 하면서 몇 번인가 화면을 번거롭게 뒤로 돌려 보아야 했다.
시청자들이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도록 좀 더 자상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으면 좋았을 것이다. 

한번은 볼만하다는 건 한번도 안 봐도 괜찮다는 말라고 한다.
그래도 결코 그렇지 않은 의미로 드라마 
『보건 교사 안은영』은 한번은 볼만했다. 
온전한 이해를 위해 원전 소설을 읽으면 더욱 좋겠지만.


*출처 : 넷플릭스


안은영은 고등학교 보건 교사다. 

대형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편하게 지내려고 학교로 옮긴 평범한 생활인이다.
다만 그녀에겐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젤리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젤리는 사람들이 남긴 생의 흔적이자 다양한 욕망의 잔여물이다. 
젤리는 학교에 출몰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안은영은 보건 교사로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젤리들을 제거하기 위해 나서게 된다.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투덜거리면서.

안은영은 불굴의 의지와 사명감으로 무장한 투사가 아니다.
그래서 늘 고민하고 놀라고 슬퍼하고 절망한다.
그의 유일한 지원군은 한쪽 다리를 다친 한문 교사 홍인표뿐이다. 
둘 다 학교라는 조직 안에서 그다지 존재감이 없는 교사들이다.

젤리가 본질에서 나쁜 기운의 결정체만은 아니다.
때로는 '정인(
情人)을 잃은 아픈 마음'이고, 알면서도 피할 수 없어 당하고 사는 억울함이며, 
'혼자서 거기 오래 있는 죽음'이기도 하다. 
그런 젤리들을 '압지석(壓池石)'으로 눌러놓는 대신 풀어놓고 해원()의 방법을 모색할 수 있어야 '보건'일 것이다. 
안은영은 젤리를 없애기도 하지만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한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고 했던가.

사실 젤리보다 더 나쁜 문제는 젤리를 이용하고 통제하려는 조직과 사람들이다.
'안전한 행복'이라는 단체나 원어민 교사 매켄지 같은 인물이 거기에 해당할 것 같은데
드라마에선 끝까지 이들의 역활과 학교와의 관계를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다만 안은영을 향한 매켄지의 비아냥으로 그들의 실체를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보통은 싸우다가 죽지. 근데 가난하게 혼자 죽는다.

아무도 몰라. 너희들이 뭐 하다가 죽는지.
아니, 너희들이 죽어도 죽었는지조차도 몰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싸움에 안은영은 나선다.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운명에 '아 씨팔!'이라고 내뱉으며 나선다.
결코 한 방에 결정타를 날릴 수 없는 장남감 칼과 비비탄 총을 들고.
그리고 한문 교사와 '습관적으로' 손을 꼭 잡고.

몇 해 전 TV 드라마 『송곳』에는 이런 말이 나왔다.

"우리는 선한 약자를 위해 악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운다"라고.
안은영이 그렇다.
생각해보면 '시시한' 우리도 가끔은 그랬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런 '시시함'으로 세상은 '시시하게'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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