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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다가오는 '퍼펙트 스톰'

by 장돌뱅이. 2021. 2. 23.

자정 가까운 시간에 꼭꼭 숨은(?) 친구


토요일. 
유치원에 가지 않는 손자 1호와 열두 시간을 함께 노는 날이다.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에 20분쯤 의자에 앉는 것을 빼곤 정말 쉼 없이 놀아야 한다. 
좀처럼 지치지 않는 친구는 낮잠이 없다. 낮잠은커녕 저녁잠도 없다.
이번에는 작심을 하고 친구가 지쳐서 그만 놀자고 먼저 말할 때까지 놀아주기로 마음먹었다.
친구가 얼마나 놀 수 있는지 한번 해보자는 쓸데없는 오기 같은 것도 있었다.
그동안 밤이 늦으면 항상 내 쪽에서 먼저 지쳐 은근히 친구에게 잠자리에 들기를
암시, 채근, 강요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마술놀이, 원반 날리기, 책 읽기, 왕비 놀이, 우주선 놀이, 윷놀이, 등등.
저녁때부터는 친구의 요청으로 집안일을 마친 아내도 합류를 해야 했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각에 친구는 난데없이 술래잡기를 제안했다. 
방과 부엌, 목욕탕, 그리고 책상 밑과 옷장 속, 베란다까지 번갈아 가며 숨었다.
하지만 아파트 안에서 숨을 곳이란 게 뻔해 이내 숨을 장소가 궁색해졌다.
그것을 핑계로 놀이를 그만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자 친구는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제까지 숨은 장소를 다 잊어먹기! 빨리 잊어먹어요!!!"
나중엔 같은 장소에 반복해서 숨어도 개의치 않았다.
아내와 나는 놀이보다 층간 소음에 신경이 쓰였다.

자정이 가까워오면서 친구의 눈에도 졸음이 고였고, 걸음걸이도 느릿해졌다.
판단력도 오락가락하여 가위 바위 보 하고 이기고 졌는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자기는 누워있을 터이니 나보고 술래인 자신을 대신해서 할머니를 찾으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나중엔 숨기도 귀찮아졌는지 소파 모서리에 길게 누워서 자기는 숨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내와 나는 눈에 안 보이는 연기를 해야 했고 친구는 그걸 더 재미있어했다.

새벽 한 시가 가까워 친구는 내가 책을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무려 16시간의 강행군이었다. 이전까지는 14시간이 최장 기록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나는 다시 한번 더 깨달았다.
하루 종일 밖에서 자전거와 킥보드로 지쳐 돌아와도 저녁밥만 먹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재충전이 되는 친구와 '잠 겨루기'는 무의미하다는 걸. 


손자 1호의 뒤를 이어 무럭무럭 다가오고 있는 2호가 가세하면
그야말로 버거움을 증폭시킬 '퍼펙트 스톰'이 만들어질지도 모르겠다. 

즐거운 비명이긴 하지만 친구들을 일찍 재우는 묘수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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