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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인생은 이벤트

by 장돌뱅이. 2021. 2. 26.

학창 시절 늘 유쾌함이 가득했던 딸아이가 '인생은 이벤트'라고 한 적이 있다.
특별함은 특별하게 만들어야 생긴다는 뜻이었다.
( *이전 글 : https://jangdolbange.tistory.com/169  )


아내는 며칠 전부터 보름 준비를 했다.

오곡밥에 들어갈 재료와 말린 나물을 체크하고 부족한 것은 장을 봤다.

어제는 팥, 수수, 차조, 찹쌀, 검은콩이 들어간 오곡밥과  고사리, 가지, 호박오가리, 도라지, 토란대, 취나물, 무나물, 곤드레나물, 콩나물의 아홉 가지나물을 만들며 보냈다. 보통 때는 내가 부엌일을 담당하지만 명절 음식은 아직까진 아내가 맡아서 한다. 옛 음식들은 준비에서부터 복잡하고 조리 과정도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옛말에 말린 채소를 보름에 삶아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고 지날 수 있다고 했다. 저장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 겨울에도 식이섬유를 섭취하려는 지혜라고 하겠다.  내가 힘을 보탠 것 콩나물국과 콩나물무침뿐이다.

어릴 적 보름은 음식보다 뭔가 신명 나는 일을 준비하는 듯한 동네 분위기 때문에 좋았다.
보름 전 설날이 개인적 행사가 주류를 이룬다면 보름은 마을 공동체 행사가 많은 날이었다. 들썩이는 가락의 농악대를(나는 태평소 소리를 좋아했다)  쫓아다니다 해가 저물면, 개구쟁이 우리들은 일 년에 한 번 공식적으로 허락된 불장난, 쥐불놀이를 했다. 어른들은 달집을 태우며 액운을 쫓고 달맞이를 하고 여기저기서 흥겨운 술판을 벌였다. 밤이 이슥하여 속이 헛헛해지면  우리들은 누구네 골방으로 무람없이 몰려가 나물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이제 아파트 숲 속에서 보름은 음식으로만 남은 것 같다. 음식은 문화이며 유전자이다.
오곡밥은 반찬 없이 먹어도 맛있다. 들기름을 발라 구운 김에 싸 먹으면 금상첨화다.
보름나물의 색은 수수하고 맛은 은근 · 구수하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儉而不陋)'는 우리 전통 미학의 기본 정신이 음식에도 스며 있는 것 같다. 귀밝이술은 화이트 와인으로 했다.

올 한 해 귀에 좋은 소리들만 들려오기를 기원하며 아내와 잔을 부딪혔다.

오늘 저녁엔 아내가 만들어둔 보름음식을 딸아이네와 다시 한번 더 먹을 예정이다.
손자친구는 콩나물을 좋아한다. 다른 나물도 권해봐야겠다.
친구의 호불호는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에 바로 결정된다.

호두를 싫어하는 친구지만 부럼을 깨트리는 '놀이'는 좋아할 것이다.

앞으로 손자는 축제는 핼러윈으로, 보름은 별난 음식을 먹는 날로만 기억할지 모른다.
어쩌겠는가 세상은 늘 변하기 마련이고 손자친구는 우리와는 다른 시간을 살아갈 것인데······.
내겐 친구와 음식과 놀이를 함께 나누는 지금 이 시간이 축제다.
딸아이가 알려준 '인생은 이벤트'라는 말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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