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초 아내는 텔레비전 요리 프로그램을 보며 열심히 메모를 하곤 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니 책 이외에 새로운 음식 조리법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텔레비전이 유일했을 때였다.
"구태여 요리를 할 것 없이 저 재료들을 한꺼번에 냄비에 쓸어 넣고 그냥 찌개로 끓여도 맛있지 않을까?"
TV 요리 강좌라는 게 유한마담들의 한가한 놀이처럼 느껴져서 내가 잠시 비아냥거렸다.
아내는 그것이 음식과 자신을 향한 '망언'이라며 눈총을 쏘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비아냥은, 비록 장난이었지만, 음식에 대한 나의 얕은 인식 때문인 것 같다.
일상에서 차지하는 식사라는 행위와 그 식사의 구체적인 표현인 음식이 주는 정서적인 의미를 배제하고
허기를 채우는 건조한 '연료 보충'의 의미만을 우선하는······.
얼마 전 EBS의 "최고의 요리비결' 을 보며 메모를 할 때 아내가 옆에서 슬쩍 한 마디를 던졌다.
"그냥 그 재료들 한꺼번에 넣고 찌개를 끓이면 맛있을 것 같은데······. 아닐까?"
해묵은 '복수혈전'이었다.
(세상의 남자들이여 아내에게 말조심합시다. 나이 들어 백수 되면 돌려받습니다.)
한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이른바 '맛집'을 찾아다닌 적이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근엄한 표정을 짓거나 화를 내는 사람을 없을 것이기에 '맛집'은
여행의 즐거움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아내와 어린 딸아이까지 이 점에 관해서는
쉽게 의기투합 해서 국내외 여행의 경로를 아예 '맛집'을 따라 정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부터 음식을 직접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인터넷과 책을 뒤져 간단한 레시피를 찾아 시작을 했다. 아내는 내게 '대장금'이었다.
은퇴를 하면서 몇몇 요리 강좌를 신청해 들었다.
단기 강좌도 있었고 SK그룹에서 운영하는 "NONO스쿨"처럼 1년 과정도 있었다.
음식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었고 요리를 하는 것은 미지의 세상을 경험하는 여행과 같았다.
오늘은 영상 강좌에서 수플레(soufflé ) 팬케이크 만드는 법을 배웠다.
수플레는 '바람이나 가스로 부푼(요리)'이라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다.
달걀흰자와 설탕을 휘저으면 부풀며 끈끈한 점액질처럼 변하는 것을 머랭(meringue)이라고 한다.
이것을 우유와 밀가루를 넣은 노른자와 다시 섞어 팬에 구워내면 수플레 팬케이크가 되는 것이다.
말로는 간단한데 문제는 '망할 놈의' 머랭이었다. 강사는 천 번쯤 휘저으라고 했다.
특히 처음 3 백번쯤은 회전 강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팔이 뻐근해지도록 힘주어 '뺑뺑이'를 돌려도 점액질은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
여성 강사는 쉽게 만들어내는 걸로 보아 힘보다는 숙련이 필요해 보였다.
기준 미달의 머랭으로 어찌어찌 만든 팬케이크를 아내 앞에 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족함 때문에 실패의 무용담(?)으로 더욱 풍성해진 식탁이 되었다.
영화『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속 천재는 하늘에서 원하는 음식을 소나기처럼 내려주는 기계를 만들었다.
하긴 이미 현실 속에서도 하늘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택배에서 '내리는' 세상이 된 지 오래다.
휴대폰에 몇 번의 클릭만 하면 이른 새벽에 신청한 물건을 받을 수 있고,
어느 때건 먹고 싶은 음식도 따끈따끈한 채로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편리 이상의 축복의 의미로 받아들이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맛집'의 요리만큼 세련되고 맛깔스럽지 않아도 내가 만든 음식으로 가족들을 식탁 앞으로 불러 모으는
성취감과 훈훈함이 없다면 삶이 너무 건조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음식 맛의 반은 '공기'의 맛이라고 한다.
이때 '공기'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식사하는 공간의 분위기를 모두 아우르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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