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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브런치

by 장돌뱅이. 2021. 4. 29.

브런치(BRUNCH)는 아침(BREAKFAST)과 점심(LUNCH)의 합성어다.
규범 표기는 아니지만 우리말로는 '아점'(아침 겸 점심)쯤 되겠다.

요즈음이야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일상 용어가 되었지만,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하던 옛날 농경 사회나
잔업, 철야, 특근으로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돌던 경제 개발 시기에는
결코 생활 속에 들어올 수 없는 단어이고 먼 서양의 문화였을 뿐이다.
아침과 점심 사이에 아점은 없고, 대신에 새참만 있었을 것이다.

  

 

직장에 다닐 때 브런치는 주말 아침에야 유효한 단어였다.
한껏 자고나서도 느릿느릿 게으름을 피우다 산책을 나가 가까운 카페에서 아내와 커피와 음식 -
프랜치 토스트, 에그 베네딕트, 팬케이크, 와플, 오믈렛 - 을 느긋한 기분으로 나누곤 했다.
  ( 이전 글 : BEACH AND BRUNCH )


 

여행 중의 식사는, 특히 브런치는 나른함과 한가함의 밀도를 높인다.
"역시 음식은 남이 만들어주는 게 제일 맛있어."
아내와 주고받는 상투적인 농담도 상큼한 산들바람이 된다.

호텔 대신 민박(B&B)으로 숙소를 잡으면 투숙객들과 마주하게 되는 아침 식탁.
초면의 어색함이 사라지고 나면 대개 이런 말로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WHAT BRINGS YOU HERE?" (이곳에 무슨 일로 왔나요?)

같은 여행인 것 같아도 알고보면 여행의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결혼기념일을 자축하려는 조용한
노부부도 있고, 이곳저곳에 호기심이 왕성한 이제 막 신혼인 젊은 부부도 있다.
음식을 앞에 두고 지극히 작고 피상적인 사연을 나누다 보면, 마치 서로의 깊은 내면을 들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친밀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곤 했다. 식사 후엔 이내 흩어져 각자의 길을 갈 뿐이지만.  



요새 며칠 집에서 브런치 음식을 만들었다. 팬케이크, 프렌치 토스트, 샐러드 등이었다.
옛날 임금님이 아침 수라 전에 가볍게 들었다는 장국죽(粥水刺)도 만들어 보았다.
색다른 음식으로 코로나로 높아져가는 여행지수(?)를 조금이라도 달래고 싶었다.

아내와 마주 앉아 음식을 나누다 보면  문득 여행 중에 받았던  질문이 떠오를 때가 있다.
'WHAT BRINGS US HERE?'
'아내와 나는 어떻게 부부가 되어 지금 여기에 함께 앉아 있는 것일까?'
오랫동안 '당연히' 옆에 있어온 아내를, 아내와 함께 한 세월을 신비롭게 만드는 화두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음식은 진부한 일상을 덥히고 사랑을 깨우치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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