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한국

남이섬의 가을.

by 장돌뱅이. 2005. 2. 22.


* 위 사진 : 남이섬과 선착장, 대부분의 승객이 중국인이었다.

남이섬은 원래 홍수 때만 섬이 되던 곳이었으나 청평댐이 건설되면서 십사 만여 평의 작은 섬이 되었다.
행정구역 상으로 남이섬은 강원도 춘천시 남면 빙하리로 되어 있는
강원도 땅이다.
그럼에도 흔히 우리는 그곳을 경기도 가평 땅으로 착각을 하곤 한다.

그 이유는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는 장소가 경기도 가평에 있기 때문이다.

원래 빙하리 사람들이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던 땅이었는데 60년대 중반 한 관광회사에서
섬을 사들여 잔디와 나무를 심고 오솔길을 만들어 놀이터로 개발을 하였다.
그때 이 섬에 남이장군이 묻혀있다는 전설이 담긴 돌무더기가 있었는데, 관광회사에서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고 주변을 번듯하게 꾸몄다.  

섬 이름인 남이섬도 거기에서 따와 이제는 사람들이 남이장군은 몰라도 남이섬은 알게 되고
혹은 남이섬이 역사 속의 남이장군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곤 하니
관광회사의 광고 의도는 100% 성공한 것으로 봐도 되겠다.  
실제의 남이 장군이 묻힌 곳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무겁지 않은 착각과 허구의 사연을 지닌 때문일까?
남이섬은 근래에 영화와 TV 드라마라는 ‘가상 세계’의 또 다른 이름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듯 했다.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배에는 가을남이섬을 즐기러 온 승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의 반 이상은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었다.
아내와 나는 다소 의외였다. 서울에서도 결코 가깝다고 할 수 없는 이 작은 섬에
먼 나라 외국 관광객까지 불러 모을 만한 그 무엇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옆자리에 앉은 중년의 중국인 아줌마에게 서툰 중국어를 섞어가며 간신히 물어보니
그 이유를 TV 드라마 “동지리엔커(冬季戀歌)”라고 말하며 글로 적어주기까지 했다.
그것은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우리나라에서 제작 방송된 ‘겨울연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남이섬 내에서 그 TV드라마의 일부가 촬영되었던 모양이다.

타이완에서 왔다는 그 아줌마 옆에 매달린 초등학생 저학년 정도의 어린 여자 아이도 “배용준! 최지우!”를 서툴게 발음하며,
자신이 유명 배우들이 서있었던
‘역사적인’ 장소에 간다는 사실을 뽐내고 있었다.

중화권에서 유행한다는 ‘韓國流行文化’, 이른바 ’한류’의 한 현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중국이나 타이완뿐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확산 추세에 있다고 하던가?
그와 더불어 한국 관련 제품의 선호현상까지 나타나 한국음식, 한국 제품도 인기를 누린다고
들었는데 이제 한국 내의 방송극 촬영지까지 그들의 여행일정에 포함시킬 정도라면
어떤 의미로건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과 대만에서 온 여행객들은 섬 초입에 있는 겨울연가의 대형표지판 앞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텔레비전에서 본 메타세콰이어의 숲길에서 극 중의 배우들처럼
함박웃음을 지으며 번갈아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댔다.

요즈음에 들어 영상 매체는 고도의 부가가치를 창조하는 중요한 국가적인 산업의 의미로 강조되지만,
어릴 적 나에게 영화는 흔히 말하듯 단순히 꿈이라는 말로는
좀 설명이 부족한, 구체화되고 가시화된 어떤 설렘이었다.

서울의 최고 변두리‘답게’ 내가 자란 마을에는 상설극장이 없었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멀리 청량리까지 나가야했는 데 그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신에 봄에서 가을 사이에 한두번씩 마을을 찾아오던 가설극장이 있었다.
마을 공터에 흰 천막으로 울타리를 둘러쳐지고 ‘기쁜소리사’라는 마이크를 단 선전 차량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망우리 주민 여러분!
오늘 저녁 여러분을 모시고 상연할 영화는......”

어쩌구 하며 동네를 도는 날이면 동네 조무래기들은 모두 열광을 하며 그 차 꽁무니를 따라 달렸다.
그런 날엔 평소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매달리던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도
시들한 것이 되어 우리는
긴긴 여름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대낮부터 영화 포스터가
도열하듯 붙어 있는 가설극장의 울타리를 서성이곤 했다.

몇몇은 부모님한테 영화비를 타내어 으쓱거리고, 그렇지 못한 몇몇은 날이 어두워진 뒤 으슥한 곳의 천막 울타리를 들추고
가설극장으로 기어들다 붙잡혀
머리통을 쥐어 박혀야 했다. 그런 동네에서 영화가 상연되는 며칠 동안 아이들의 마음과
혼은 가설극장을 떠나지 못했고 영화를 보거나 못보거나 마치 축제를 치르는 듯한 기분에 취할 수 있었다. 

 어린 이윤복의 가슴을 저미는 이야기보다, 그냥 울음이 아니라 극장 안을 가득 채우던,
대성통곡이라고 해야 할 정도의 울음소리가 더 기억에 남는 “저 하늘에도 슬픔이” 나,
‘조국’과 ‘전우’라는 단어에 필요 이상으로 목이 메이고 가슴이 저려오던 “돌아오지 않는 해병”,
아니면 ‘짧고 굵게 산다’는 좌우명의 “강재구 소령” 등이 그 어린 시절의 영화였나 보다.

주인공이 위험에 처한 절대 절명의 순간에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나 총성 한방으로
기사회생을 하여 반전을 이룰때 관객들의 신명나는 박수소리나  영화 상영 도중 느닷없는 정전이 되었을 때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아우성으로 돌변하던 어둠이
또한 그 시절의 모습이었다.

누나들은 늘 무서워 벌벌 떨면서도 도금봉과 이예춘이 나오는, ‘월하의 공동묘지’나
‘살인마’ 같은 괴기스러운 공포 영화를 좋아하였지만 나는 사내아이였던지라 전쟁영화나
무협영화를 좋아하여 영화 선정을 놓고 누나들과 의견 충돌이 있곤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나는 박노식과 장동휘가 나오는 ‘명동출신’이나
‘명동부르스’ 류의 ‘쌈마이’ 혹은 ‘주먹쌈’ 영화를 좋아했다.
명절날이면 모처럼 먼 길을 버스를 타고 나가 발 디딜 틈도 없는 관객 속에서 깨금발을 서서 보던 그 영화들. 


    “무대는 항상 명동이고 시간은 밤이다. 한편에는 검은 옷과 검은 안경을 쓴
     장동휘가 서있고, 똘마니 장혁 정도가 한 떼의 졸개들을 데리고 꾸부정하고
     삐딱하게 옆에 서 있다.
    맞은편에는 박노식이 하얀 양복에 하얀 구두, 하얀 모자에 하얀 바바리코트를
    팔은 끼지 앉은 채 어깨에만 걸치고(이 모습이 예술이다!) 서 있다.

    장동휘 : 미응동(명동)을 떠나라
            ( 이 독특한 ‘명동’ 발음을 들려드리지 못해 유감이다. 목소리에는 물론
            잔뜩 힘이 들어가 있고 낮게 깔려 있다.)
    박노식 : 거부한다면?
    장동휘 : 살아남지 못하리라.
    박노식 : 그것마저 거부한다면?”
                                                   -이영미의 글 중에서-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당시에 영화를 보며 마음을 졸이던 나의 긴장감과 영화 속
배우의 진지한 연기 자체가 모두 희극적이지만 나는 그런 유치함과 촌스러움도
나를 키운 기름진 자양분이었을 것이기에 언제나 그 시절을 따뜻하게 추억하고 싶어진다.

언젠가 결혼 전 아내와 나는 남이섬을 거닌 적이 있었다.
겨울이 지나면 군 입대가 예정되어 있던 그해 겨울.
쇠잔한 겨울 햇빛이 사선으로 비껴 드는 나무 사이 눈길을 아내와 난 오래도록 걸었다.
군대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다기보단 왠지 어디론가 도망치는 것만 같아
스무 살 초반이란 젊음이 헐벗은 겨울나무처럼 그냥 서러웠다.
그 서러움 또한 유치한 감상에 다름 아니었지만 중년의 나이가 되어 되돌아보니
그것도 인생에는 유치한 것이 없다는 말로 감싸고 싶어질 뿐이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시절,
딸아이가 좋아하는 댄스가수를 일부러 들먹이며 딸아이를 놀린 적이 있다.
아이들을 놀려 울게 만드는 것은 나의 오랜 악취미이다.
그때 약이 올라 식식거리며 대꾸를 하던 딸아이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며칠 전 딸아이는 스스로 그 일을 들추어내더니 내가 그땐 좀 유치했지? 하고 물었다. 


    쪼그만 가시내 하나 때문에
    예배당 종소리 한번도 안놓쳤다
    만날 수 있을까
    새벽잠 떨치고
    눈구렁 헤치며 달려갔다

    그로부터 이십년
    나는 나에게 묻는다
    오늘도 그 종소리 들려오냐고
    어푸러지며 고꾸라지며
    달려갈 거냐고
                       -심호택의 시, 이십년 후-


딸아이의 말에 그냥 웃고 말았지만 늦게나마 대답 대신 딸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이다.
유치하다니!
지나간 모든 시간은 저마다의 기억 속에서 소중할 뿐이다.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사랑하고 추억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배안에서 만났던 대만 아줌마가 붉은 단풍나무 잎을 잡고 소녀 같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좋으냐고 물으니 좋단다.
단풍이 아름다우냐고 물으니 아름답단다.

햇빛이 나뭇잎 속으로 속속 스며드는 가을 오후의 남이섬이었다.

(2003년 11월)

'여행과 사진 > 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과꽃이 있는 풍경.  (0) 2005.04.27
배꽃이 있는 풍경.  (0) 2005.04.27
아! 양양 낙산사  (0) 2005.04.05
경북 청도 소싸움.(2005년 3월)  (0) 2005.03.31
남한강변의 옛 절터  (0) 2005.02.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