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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시래기

by 장돌뱅이. 2022. 1. 25.

시래기 된장볶음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우기 위해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도종환, 「시래기」-


시래기는 무청을 말린 것이다.
늦가을 김장용 무를 다듬은 뒤 아내는 무청을 버리지 않고 아파트 베란다에 말린다.
통풍을 위해 문을 열어 두고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커튼을 쳐둔다.
시래기 마르는 냄새가 베란다에 가득해진다. 비릿한 듯하면서도 은근하고 구수하다.
적당히 마르면 무청은 더 이상 무청이 아니고 시래기가 된다.
버석버석해진 시래기를 물에 오래 불리고 삶아 줄기 부분의 껍질을 벗긴다.
그리고 일정한 양으로 비닐 봉지에 나누어 담아 냉동실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먹는다.  
백수가 되고 난 뒤에야 시래기 음식 한 접시가 만들어지기까지 그런 수고로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은 식재료에 제철이라는 개념이 없다.
한 겨울에 푸른 채소가 지천이고 시래기를 비롯한 각종 나물쯤이야 언제든 원하면 쉽게 얻을 수 있다.

대보름 저녁이면 아내와 나는 여러가지 나물을 만들어 먹지만 직접 말리고 저장한 재료는 몇 가지 되지 않는다.
대부분 마트에서 사거나 주변 지인들이 준 것들이다.


빨래 건조대에 걸린 시래기는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시절 어머니는 봄에서 가을에 이르기까지 때에 맞춰 밭에서 나는 거의 모든 채소들을 말려서 저장했다.

호박, 가지, 무, 고구마줄기, 고춧잎, 토란대 등을 내가 기억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겨울철 밥상에 나물과 장아찌로 올라오곤 했다.
"먹을 것을 말리고 저장하는 행위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것은 삶에 밀착된 행위이기에 아름답다."(공선옥)


아내가 직접 갈무리해 둔 시래기를 된장과 볶아, 역시 아내가 지인에게서 사 직접 방앗간에서 빻아온 들깻가루를 넣었다.
시래기와 된장의 구수함에 들깨의 고소함이 어우러져 그것만으로 저녁 한 끼가 거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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