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

'손' 없는 날

by 장돌뱅이. 2022. 1. 28.

'손 없는 날'.
전통적인 민간 습속이라고만 알고 있다가 요즘 자주 매스컴에 오르내리길래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았다.


'손'은 동서남북 네 곳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사람의 일을 방해하는 귀신이다.
음력으로 1이나 2가 들어가는 날은 동쪽에 '손'이 있고, 3이나 4가 들어가는 날은 서쪽에,
5나 6이 들어가는 날은 남쪽에 있고, 7이나 8이 들어가는 날은 북쪽에 있다.
9와 10이 들어가는 날은 '손'이 하늘로 올라간다. 귀신이 인간의 일에 훼방을 놓지 않는 길일인 '손 없는 날'인 것이다. 


 귀신도 쉬는 날, 짐 부리는 사내, 빈 그릇 위에 빈 그릇, 의자 위에 의자, 쌓고 쌓는다, 귀신이 쉬는 날,
사내의 짐값은 높지만, 꼭대기 올라가는 사다리차만큼, 덜컹, 덜컹, 내려 앉은 사내의 등, 사내는 손
없는 날의 손, 집을 옮기며 짐을 부린다, 동서남북을 옮긴다, 기억을 옮긴다, 귀신도 부리지 못할 짐,

- 김경후의 시, 「손 없는 날」중에서 -


설날에 쌀을 이는 조리를 벽에 걸어두는 민간 풍속이 있다. 한해의 복을 모으고 나쁜 기운을 쫓는다는 복조리다.
예전엔 섣달그믐 날이면 복조리를 파는 장사가 소리를 치며 동네를 지나거나 집을 방문하곤 했다.
아내와 그들에게서 복조리를 샀던 기억도 있다. 기복(祈福)이나 벽사(壁邪)를 믿어서라기보다 단순한 재미 때문이었다.


'손 없는 날'의 '손'은 기껏해야 그런 복조리 정도의 풍습 아닐까.
 9, 10일에 '손'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비행기 이륙을 금지시킬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의 삶이나 사회적 활동은 어떤 날에도 '귀신도 부리지 못할 짐'이라도 동서남북으로 옮겨가면서 이루어지므로.

90년대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 비디오 공익광고 중에서


옛날 천연두는 종두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 중의 하나였다.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얼굴에 심한 곰보 자국이 남는 무서운 병이었다.
천연두는 마마, 두창, 또는 손님이라고도 불렀다. 

'손'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혹시 '손님'은 '손'을 높여 부른 것은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상상도 해보게 된다.
'손님'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그를 공손히 돌려보내는 것을 치유라 생각하여 배송굿을 했다고 한다.

첨단 과학의 시대인 21세기 대선 정국에 뜬금없이 등장한 '손'님을 물리치기 위해 큰 굿이라도 한 판 벌어야 할까? 


염병 땀병 흑사병 호열자 장질부사
폐병에 가던 귀신 마마에 가던 귀신
왼갖 잡색 객사귀 원귀야
오늘 많이 먹구 걸게 먹구
모두 먹구 나가서라

- 황석영의 소설, 『손님』 중에서 -


'손'아 물러가라, 훠어이!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이 온 설날 아침의 기억  (2) 2022.01.31
하루만이라도 멈춰 달라  (0) 2022.01.30
그래도 나와 상관있는 일  (0) 2022.01.27
시래기  (3) 2022.01.25
산이 좋고 절이 좋지만  (2) 2022.01.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