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이 들어간 책이나 영화 제목이 제법 많다.
"보바리부인", "자유부인", "채털리부인", 그리고 비디오 대여점에서 눈길을 끌던 "애마부인"과 "젖소부인"까지.
그중에 내가 처음 접한 것은 플로베르의 소설『보바리 부인』이었다.
고우영이 그린 만화 『수호지』속 반금련과 서문경이 '에로틱한' 분위기를 날마다 스포츠신문 위에 띄우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프랑스의 고전 문학으로서가 아니라 유부녀의 불륜과 파멸을 다루었다는 '정보'에 파멸보다는 흥미진진한 불륜을 찾아서 '선데이서울'을 읽는 기분으로 『보바리 부인』을 읽었다. 물론 응큼한 청소년의 섣부른 호기심을 만족시킬 만한 짜릿함은 없었다.
대신에 "인간의 의지를 나뭇잎처럼 통째로 날려버리고 마음을 송두리째 심연으로 쓸어가는 하늘의 폭풍우 같은' 사랑을 꿈꾸는 여인의 갈증만이 빼곡할 뿐이었다. 그런 격정에 어울리는 디테일한 묘사를 기대했지만 외간 남자와 마차 한 번 타는 게 다여서 맥이 빠지고 말았다. 게다가 겨우(?) 그걸 가지고 외설죄로 재판까지 갔다니!
가정주부의 춤바람과 외도를 그린 소설『자유부인』은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 당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라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이적행위' 혹은 '북괴의 사주를 받은 이적 소설'이라는 황당한 주장에 투서와 고발까지 이어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하지만 그로인해 오히려 이 소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져 연재를 하는 동안 신문 판매 부수가 3배로 늘어났고, 책으로 출판되어선 당시로서는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자유부인』은 소설 대신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복원하여 유튜브로 공개한 1956년 판 흑백영화 로 보았다. 영화 역시 개봉 당시 소설만큼 세간의 주목을 받아 흥행에 성공했다고 한다. (https://youtu.be/FkAbVQhfpmw)
대학교수의 부인으로 평범하게 가사를 돌보던 오선영은 취직을 통해 바깥세상과 접하면서 댄스홀과 사교춤의 존재를 알게 되고 동창들과 함께 점차 그런 분위기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 선영은 한복 대신 양장을 입고 춤을 배우러 다니면서 외도까지 하게 된다. 당연히 그런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자유부인』은 한국전쟁 후 밀려들어 온 미국 문화에 휘말린 우리 사회의 한 단면 - 구체적인 생활 속에 차분하게 여과하여 침전시키지 못하고 껍데기만 받아들인 외래 문화와 생활양식이 빚어낸 '웃픈' 현실 - 을 보여주었다. 남자들의 축첩(蓄妾)과 외도는 소설과 영화에서 자주 그려졌음에도 사회적 '당연'으로 윤리와 도덕 논쟁에서 제외하면서 여성의 일탈에는 '북괴군'에 '중공군'까지 들이댄 당시의 호들갑스러운 비판 또한, 남녀문제 인식의 시대적인 한계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우스꽝스럽다.
그런 '부인'들보다 D.H 로렌스의『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훨씬 선정적 강도가 높다는 소문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있었지만 왜 그랬는지 내내 독서 목록에서 빼두었다가 작년에서야 읽게 되었다.
『채털리···』의 줄거리는 간단히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하반신 마비와 성불구자까지 된 클리퍼드 채털리 씨의 부인 코니가 남편에게 고용된 사냥터지기 멜러즈와 사랑에 빠져 도피를 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1928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작가의 자비로 첫 출판된 『채털리···』는 노골적인 성 묘사로 곧바로 외설 시비에 휘말리게 되었다. 또한 이른바 '네 자리 단어'라고 하는 'FUCK', 'SHIT' 같은 비속어의 빈번한 사용도 문제가 되었다. 영국 재판에서 검찰관은 성행위를 자세하게 묘사한 부분이 열두 군데나 되는데 그것은 단지 시간과 장소를 달리할 뿐 핵심은 언제나 쾌락과 관능일 뿐이며 저속한 욕설이 수십 번씩, 많게는 30회나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채털리···』는 판매 금지가 되었고 영국과 미국의 세관 당국에게는 몰수 품목이었다. 이는 수많은 불법 해적판을 유통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사람들은 『채털리···』를 손쉽게 구해볼 수 있고 가질만한 사람은 다 가졌음에도 탄압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1960년 미국과 영국의 출판사가 『채털리···』의 무삭제판을 출판하면서 정부와 소송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합법적 출판이 가능하게 되었다. 영국 재판의 배심원들은 '음란물로 규정하되 공익적 기능을 인정하여 출판이 가능하도록 결정'했다고 한다.
책의 초판을 인쇄할 때 로렌스는 영어를 모르는 이탈리아 식자공에게 책의 내용에 대해 사전에 설명해주며 내키지 않으면 거절해도 좋다고 말했다. 피렌체의 식자공은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쿨하게 말했다고 한다. "난 또 뭐라고. 겨우 그런 말인가요? 그건 우리가 매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매일 하는 것' 때문에 『채털리···』30여 년 동안 금서가 되었던 것이다.
로렌스는 도덕적 엄숙주의, 금욕적 이성주의에 대하여 '관능적 쾌락과 육체를 죄악시하고, 육체적 쾌감에 오명을 씌워 '더러운 비밀'로 금기시하는 집단 신경증 질환의 증상'이라고 맞섰다. 소설 속 클리퍼드의 친구 듀크스의 입을 빌려서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지식이란 의식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의 두뇌와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만큼 우리의 배때기와 자지로부터도 나오는 거야. 정신은 오직 분석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뿐이지. 정신과 이성이 다른 것을 누르고 판세를 잡게 해보라고. 그럼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비판하고 죽여버리는 것뿐일 테니까. (···) 삶을 살아가는 동안 어느 정도 우리는 각각 온전한 생명을 지닌 유기적 총체라는 것이네. 그런데 우리가 정신생활이라는 것을 시작하는 순간 그 생명의 사과 열매를 따버리는 것이 되는 거야. 사과와 나무 사이의 연결, 즉 유기적 연결을 끊어버리는 셈이지. (···) 마치 따버린 사과가 썩는 것이 자연적 필연인 것처럼, 우리가 악의에 가득 차게 되는 것은 논리적 필연인 거야."
소설의 외설성만 회자되어 사춘기 청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사실『채털리···』는 산업혁명 이후 돈과 기계, 차가운 이성이 지배하는 비인간적인 문명 속에서 벗어나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에 대한 로렌스 식 모색이었다.
클리퍼드 채털리를 불구로 만든 제1차세계대전이 거대한 문명적 질환인 것처럼, 그의 완고한 금욕주의, 성공과 명성을 향한 집착, 지배계급과 섬기는 계급 사이에는 넘나들 수 없는 절대적인 심연이 존재한다고 믿는 확고한 계급의식 또한 문명적 질환이었다.
채털리 부인 코니의 연인 멜러스는 말한다.
"지난 100년 동안 인간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정말 수치스럽기 짝이 없소. 남자들은 오로지 일벌레로 바뀌었고, 남자다움과 진짜 삶을 모두 빼앗겨버렸소. 난 지상에서 기계들을 다 쓸어내버리고 산업시대를 완전히 끝내고 싶소."
그런데 그 '문명적 질환'으로부터 벗어나 구원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상의 기계는 결코 쓸려나가지 않을 것이고 산업사회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지 않은가?
"남자가 따뜻한 가슴으로 성행위를 하고 여자가 따뜻한 가슴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잘되리라고 난 믿고 있소. (···) 그렇소! 바로 부드러운 애정이오. 정말로 말이오. 그리고 그건 씹의 깨달음이오. 성(性)이란 사실 접촉에 불과한 것으로서, 모든 접촉 중에서 가장 친밀한 접촉일 뿐이오."라는 멜러즈의 말은 그 상징성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너무 순진하거나 막연해 보인다.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적 발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을 비판하고 원시적 생명력을 존중하는 로렌스식 '파격'에 긍정하면서도 마음까지 잔잔하게 적셔지지는 않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선 다시 읽어본 『보바리 부인』의 방황이 이 더 절절하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고등학교 때 읽었어야 했는데 너무 나이 들어서『채털리···』를 읽었나 보다.
『채털리···』의 마지막은 멜러즈가 채털리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렇게 끝난다.
"우리는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요. 존 토머스가 제인 부인한테 잘 자라고 인사를 하는군. 좀 축 늘어진 모습이지만 희망에 찬 마음으로 말이오."
나는 갑자기 등장한 존 토머스와 제인 부인에 당황했다. 내가 어떤 인물을 건성으로 읽었나 하고 몇 쪽 뒤로 책장을 넘겨보기도 했다. 알고보니 '존 토머스'는 남자의 성기, '제인부인'은 여자의 성기를 가르키는 말이라고 한다.
넷플릭스를 뒤지다 보니 영화 『채털리···』가 올라 있다. 조만간에 봐야겠다.
탕웨이의『색계』나 박찬욱 감독의『아가씨』등으로 노출 수위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진 지금, 채털리부인의 유혹(?)에 쉽게 눈동자가 흔들릴 것 같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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