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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하산'허락

by 장돌뱅이. 2023. 2. 6.

보름날. 아내와 나는 부럼을 빼놓지 않는다. 그냥 재미다. 
언젠가 가족과 외국여행 중에 보름날이어서 부럼을 산다는 핑계로 계획에 없던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닌 적도 있다. 구하기 어려웠다. 날밤이나 호두 등은 백화점은 물론 시장에도 없었다. 껍질을 까서 볶은 땅콩은 흔했지만 껍질채 볶은 땅콩은 찾기 힘들었다. 우연히 껍질과 함께 찐 땅콩을 파는 노점상을 만날 수 있었다. 딸아이와 아내와 함께 누가 묻지도 않는데 어쨌든 껍질을 깨물어 깠으니 부럼으로 효험(?)이 있다고 우기며 먹었다. 올해는 간단히 땅콩만 샀다.

내가 부엌일을 맡은 지 몇 년 되지만 두 가지는 아직 아내의 영역이다.
하나는 부엌살림의 끝판왕이라 할 (김장) 김치 담그기이고, 다른 하나는 보름나물이다.
김장이야  아직 제대로 감당할 내공이 쌓이지 못하기도 했고 집안 축제의 의미로 함께 해야 하는 종합예술 같은 것이어서, 내가 선뜻 해보겠다고 나설 수 없었지만 보름나물을 도전해 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해마다 보름날이면 나물을 여러 가지로 푸짐하게 만들었다.
딸네에 나누어주고도 남아 보름이 지난 며칠 뒤까지 물리도록 비빔밥을 해 먹을 정도였다. (*이전 글 : 인생은 이벤트 )

 

인생은 이벤트

학창 시절 늘 유쾌함이 가득했던 딸아이가 '인생은 이벤트'라고 한 적이 있다. 특별함은 특별하게 만들어야 생긴다는 뜻이었다. ( https://jangdolbange.tistory.com/169 ) 아내는 며칠 전부터 보름 준비를

jangdolbange.tistory.com

하지만 올해는 나의 능력을 감안해서 추가구매없이 집에 있는 재료 세 가지 - 마른가지와 고사리, 그리고 마른 표고 나물만을 만들기로 했다. 마른 재료들은 생재료들보다 준비 과정이 복잡했다. 불리고 삶고 볶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다. 특히 고사리는 5시간 이상 물에 불려야 했다. 가지도 고사리만큼은 아니지만 과정은 같았다. 표고버섯은 삶은 시간을 생략하고 불린 후 바로 볶을 수 있었다. 
단계마다 아내에게 물어보거나 인터넷의 도움을 받았다. 

찹쌀, 콩, 조, 수수, 팥을 준비해서 오곡밥도 처음 지어보았다. 콩은 불리고, 팥은 삶아서 넣었다. 수수는  씻을 때 붉은 물이 맑은 물로 변할 때까지 문질러 씻어야 했다. 아내가 찹쌀밥에는 소금을 넣으라고 알려주었다.
"얼마큼?"
"적당량!"
요리초보인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적당히'와 '알맞게'다.
아내가 부엌으로 와 물맛을 보아가며 넣어야 한다고 직접 해주었다.

아무래도 세 가지 나물만으로는 너무 단출해 보여 소고기를 굽고 대파를 채 썰어 들깨소스로 무친 파채를 만들었다. 그리고 무말랭이 무침도 처음으로 해보았다. 아내는 보름나물엔 고춧가루가 안 들어간다고 했지만 고춧가루에 고추장까지 넣은, 나물인 듯 나물이 아닌  빨간 무말랭이 무침도 상에 올렸다. 귀밝이술로 화이트와인을 꺼내 저녁 상차림을 했다.

음식을 먹으며 아내는 이제 김장만 해보면 내게 더 가르쳐 줄 것이 없다며 '하산'을 해도 좋다고 했다.
마치 홍길동을 가르친 백운도사처럼, 장길산을 가르친 운부대사처럼.

연초에 세운 올해 목표 중의 하나가 '새로운 음식을 손에 익히고 만든 음식은 좀 모양 나게 담아내자'였다. 비슷비슷한 음식 몇 가지로 끼니때마다 '돌려막기'를 하듯 번갈아 상에 올리는 나태함에서 벗어나고, 기왕 만든 것이면 제대로 '플레이팅'을 해서 내고 싶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고 보기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법 아니겠는가. 

 '플레이팅'은  색채 감각과 공간구성 능력이 필요해 보이는 일인 듯했다. 아직 잘 되지 않는다. 아내는 이것에도 '하산'을 허락해 주었다. 음식을 만들고 모양을 다듬으려는 의지에 가산점을 주는 듯했다.
아내는 나를 '춤추는 고래'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올해 만든 음식 중에 나로서는 모양이 괜찮아 보이는 몇 가지를 골라 보았다.
갈 길이 멀다. 뭐든 제대로 하려면 쉬운 일이 없다.

아구찜
돈까스와 파김치
구운 두부와 볶음김치
소고기구이 영양부추무침
데리야끼소스 가지덮밥
야채유자샐러드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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