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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by 장돌뱅이. 2022. 5. 8.


내게 성경을 읽는 일은, 한용운의 시를 빌려 말하면,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 같다. 군 복무 시절 내무반에 굴러다니는 작은 신약 책을 처음 통독 한 이래로 몇 번을 읽어봤지만 이해(했다고 생각한)부분은 실천이 어렵고,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이해할 수 없어서 어렵다는 뜻이다. 문자 속에 내재된 당시의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매번 읽어나가긴 하면서도 미진한 부분이 많았다. 

'어쩌다 보니(?)'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지만(교리를 가르쳐주신 수녀님은 '한번 교인은 영원한 교인'이라는 해병대 같은 말씀을 하셨다.) 성서를 '풍성하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해설이나 강해  같은 제목의 책을 집어 들게 된다.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도 그런 이유로 읽은 책이다.  도올 특유의 다소 요란한 말법과 글법이 거북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나로서는 끝을 짐작할 수 없는 그의 학문의 깊이와 넓이에 유쾌하고 즐거운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마르코와 마가, 마태오와 마태, 루카와 루가 등등 왜 개신교건 천주교건  같은(?) 기독교이면서 이런 기본적인 용어를 통일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오래전 만들어놓은 『공동번역 성서』를 함께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인지······ 혹 출판 수입이 문제일까? 알 수 없다. 나는 가급적 『공동번역』을 기준으로 한다.)

마르코 (마가)복음서는 마태오와 루가 복음서에 앞선다고 한다. 마태오에는 마르코 복음서의 90%가 인용 또는 편집되어 담겨 있고 루가에는 마르코 복음의 2/3가 들어있다. "마태오에는 유대인 정통주의의 색깔이 있고, 루가에는 그레코-로만시대의 보편주의적 정서가 깔려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성서를 분석하는 성서신학은 존재해 본 적이 없다. (···) 성서는 신앙과 봉행의 대상일 뿐, 분석의 대상일 수가 없었다. 여기 "분석"이라 함은 성서가 신령하고 성스러운, 특수영역의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 쓴  "문헌"일 뿐이라는 명백한 상식적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역사적 문헌과 동일한 차원에서 분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서가 평범한 문헌으로서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기까지는, 우선 민권(인권)이 정치권력과 결탁된 교권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고, 인간의 이성의 권위가 신앙의 지배로부터 독립되어야 하며, 이성의 표상인 과학적 사유가 진리의 표준으로서 상식의 기준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신앙이 상식과 연속되어야 하고, 신앙의 테제들이 역사와 과학과 학문과 문화 현상 제반의 테제들과 연속되어야 한다. 신앙의 제현상이 물리적 인과성과 연속되지 않으면 자유주의는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몸의 부활"은 우리가 관찰하는 물리적 인과 현상과 연속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상식이 아닌 "신화"가 된다. 따라서 신학의 과제는 그 신화의 의미를 묻는 학문적( 이성적·경험적) 작업이 될 뿐이다. "

"마가복음은 인류사상 최초로 등장한, 유앙겔리온(Gospel, 복음)이라고 하는 유니크한 문학 장르이다.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선포하는 유앙겔리온의 선포자였다고 한다면, 마가는 예수의 삶을 선포하는 유앙겔리온을 창시했다.  바울의 유앙겔리온이 편지였고 권면이었다면, 마가의 유앙겔리온은 이야기였고 감동이었고 드라마였다. 두 유앙겔리온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전자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물었다면, 후자는 예수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바울의 유앙겔리온은 예수라는 인간의 삶에 관한 기쁜 소식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 된 죽음에 관한 기쁜 소식이다."

죽음과 부활 이후가 추상이라면  복음서에 살아있는 예수의 행적은 구상(具象)이고 구체(具體)이다. 성서 전체가 인간의 절절한 신앙 고백의 표현이겠지만 "살아 있는 하느님이나 예수를 만나"기 위해 마르코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서에 나는 특별히 주목한다. 

예수 "사역의 내용은 무료치유와 공동식사이다. (···) 예수운동의 평등주의는 유대인의 종교적 권위나 로마 식민지 세력의 위계질서를 근원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 그가 행하는 기적이나 비유담론, 치유와 공동식사는 개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중재 없는 물리적, 영적 접촉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였다. 또한 인간과 인간이 서로 중재 없는 물리적 영적 접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한마디로 그의 사역을 요약하자면, 그는 중재 없고 브로커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유대인도 아니고, 농사꾼도 아니고, 견유도 아니다. 예수는 헤브라이즘적 전통에서 볼 때 매우 이질적인 동방적 사유를 배경으로 하는 갈릴리의 민중혁명가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은 좁은 학파적 견지에서 규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 문명의 무위(無爲), 허(虛)의 사상, 그리고 인더스·갠지스강 문명의 무아의 사상, 그리고 헬레니즘의 부동심의 사상을 관통하는 인류 사상사의 대축(大軸)이 팔레스타인의 토착적 문제의식 속에서 개화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기독교의 역사는 예수의 동방적 요소의 참신함을 또다시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에 의하여 유대화하고 율법화 하고 초월주의화하고 종말론화 하고 실재론화하는 왜곡의 역사였다."

이쯤 되니 성서만큼 해석도 어렵다. 나의 독자적인 생각을  들이밀어보기에는 내가 지닌 지식과  바탕이 너무 얕다. 글을 그대로 옮기며 살아 행동했던 예수가 벌인 치유와 공동식사의 분위기와 의미를 묵상해 볼 따름이다.(*이상 " "부분은 『도올의 ···』에서 인용한 것이다.) 

거기에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마르코 복음의 다음 세 구절을 덧붙여본다. 마태오와 루가에도 조금씩 변형이 되어 등장하는 이 대목은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은 뜻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수의 말이나 행동이라기엔 선뜻 납득이 되질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 듣지 못하게 비유를 든다는 말이나 애꿎은 무화과 나무에 대한 지나친 저주, 그리고 사치스런 향유 사용을 허락하고 칭송하는 하는 행위······.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열 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의 뜻을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해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들려 준다. 그것은 그들이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 보고 알아 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 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마르코 4:10~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시던 참에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나 하여 가까이 가 보셨으나 잎사귀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여 아무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이다" 하고 저주하셨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마르코 11:12~14)

마침 예수께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셨는데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순 나르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러자 거기에 있던 몇 사람이 매우 분개하여 "왜 향유를 이렇게 낭비하는가? 이것을 팔면 삼백 데나리온도 더 받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터인데!"하고 투덜거리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참견하지 말아라. 이 여자는 나에게 갸륵한 일을 했는데 왜 괴롭히느냐?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으니 도우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도울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여자는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이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코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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