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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모기를 생각하며

by 장돌뱅이. 2022. 5. 5.

때로는 사진 한 장이 그 어떤 소설보다 길고 다양한 서사를 담고 있을 때가 있다.
무심코 들춘 사진첩에서 만난 40여 년 전 아내의 모습이 그랬다. 풋풋하고 청순한 옛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서 묵직한 저음의 북소리가 쿵하고 울렸다.

군대 가기 전 어머니에게 여자친구의 존재를 처음 알렸을 때 어머니는 누워 텔레비전을 보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씀하셨다.
"세상에나!······ 너처럼 재미없는 사람을 좋아하는 아가씨가 다 있더나!"  
무뚝뚝하고 될성부르지 않은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같은 여자로서 여자친구에게 안타까움과 동정을 느끼셨던 모양이다. 누나 역시 놀랍다는 표정과 함께 "내 동생을 좋아한다니 고맙긴 하지만 너를 남자친구로 선택한 그 애 안목은······" 하며 깔깔거렸다

나의 대학 4년의 기억은 아내 그리고 친구들과 나눈 술자리가 전부다. 그 시절 아내의 별명은 "모기"였다. 우선은 작고 여린 체구와 성품 때문에 붙여졌지만 그 속에 야무진 날카로움이 숨어 있다고 아내를 알고 있는 한 선배는 말해 주었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시인 조태일이 쓴 40여 편의 「국토」 연작시가 있다.
그중 "모기를 생각하며"가 있어 처음 읽자마자 나는 단번에 나의 애송시로 삼았다.


내가 딛는 땅은 내 땅이 아니다.
내가 읽는 글은 내 글이 아니다.
내가 하는 말은 내 말이 아니다.
내가 하는 노래는 내 노래가 아니다.
내가 눕히는 아내는 내 아내가 아니다.

모기야 지난 여름
작은 음성으로 울어싸며
내 피를 맹렬히 빨아 먹던
네 입술만이 오직 내 것이다.
내 능력이다. 사랑이다. 그리움이다.

모기야, 내 모든 것은
아리랑고개를 넘어가 버렸는데
나를 버리고 천리도 더 갔는데
발병은커녕 잘도 뛰어갔는데

모기야, 네 입술 네 음성만이
텅 빈 내 귓가며 눈 언저리에
부러울 것 없이 무성히 자란다.

- 조태일, 「모기를 생각하며(國土·1)」-

'나의 모든 것이 내 것일 수 없었던' 당시의 고통스러운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시이지만 나는 시 속 모기를 나의 '모기'로 생각하며 술자리에서 자주 읊어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일부 시적 감성이 모자란(?) 친구녀석은 시의 '모기 입술'이란 표현에만 주목하여  나의 '연애 진도'와 어떤 함수관계가 있을 거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너덜너덜해진 시집을 여러 번의 이사와 책장 정리를 하면서도 버리지 못한 건 그런 추억이 담겨 있어서다.

우연히 마주한 아내 옛 모습이 1975년에 나온 시집 『국토』의 가격 600원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누구보다 나를 잘고 있던 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던진 나에 대한 우려가 지난 세월 동안 아내에게 '레알' 현실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뒤늦은 낭패감과 죄책감이 오래 사진을  들여다보게 했다.

어제는 아내와 산책을 나갔다가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식당에서 낮술을 했다. 술잔에 특이하게도 "완벽한 인생"이란 글이 쓰여 있었다. 술잔과 아내를 휴대폰에 담으며 말했다. 
"완벽한 인생······ 당신 덕분이지. 당신은 나와 사느라 많이 힘들었겠지만."
평소 오글거리는 멘트를 거침없이 날릴 수 있는 뻔뻔함은 나의 장점이고 단점이다.
"뭐야? 아직 사진 후유증이야? 그렇지 않아."
아내가 웃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본 영화『줄리&줄리아』속 대사를 인용하며 오글거림을 증폭시켰다.
"YOU ARE THE BUTTER TO MY BREAD AND THE BREATH TO MY LIFE!"
(당신은  내 빵 위에 버터이고 내 삶의 숨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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