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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죽은 부드럽다

by 장돌뱅이. 2022. 5. 17.

아직 젊은(?) 나이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밤새 안녕'을 느낄 때가 있다.
멀쩡하던 허리가, 배가, 다리가 자고 나니 이상증세를 보이는 것이다.
엊그제 아내가 그랬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갑자기 힘들어했다.
복통에 어지러운 증세까지 호소하며 소파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이럴 땐 병원 가는 것 이외에 뭘 해야 할지 당황스럽다. 
우선 매실액을 탄 따뜻한 물을 건네고 몸을 주물러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내는 몸 상태의 부침에 따라 소파에 누운 채로 잠이 들었다깨다를 반복했다.
나이 들면 병은 친구고 병원은 단골집처럼 여겨야 한다지만 그건 견딜만할 때의 여유일 것이다.

아내를 위해 죽을 끓였다. 육수에 쌀 대신 지어놓은 밥을 넣고 끓이다가 달걀을 풀었다. 
생각해보니 세상에 자극적인 죽은 없다. 
모든 재료가 경계를 허물고 흐드러졌기 때문에 부드럽다.
은근한 죽 한 그릇이 아내의 몸 어딘가의 아픈 상처를 가만히 덮어주기를 바라보았다.


죽집에 간다
홀로, 혹 둘이라도 소곤소곤
죽처럼 조용한 사람들 사이에서
죽을 기다린다
죽은 오래 걸린다 그러나
채근하는 사람은 없다
초본식물처럼 그저 나붓이 앉아
누구나 말없이 죽을 기다린다

조금은 병약한 듯
조금은 체념한 듯
조금은 모자란 듯
조그만 종지에 담겨 나오는 밑반찬처럼
소박한 어깨들

죽집의 약속은 없다
죽 앞의 과시는 없다
죽 뒤의 배신도 없을 거라 믿는다
고성이 없고
연기가 없고
원조가 없고
다툼이 없는 죽집
감칠맛도 자극도 중독도 없는
백자 같은, 백치 같은 죽

무엇이든 잘게 썰어져야
형체가 뭉개져야
반죽 같은 죽이 된다
나는 점점 죽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요지를 이빨 사이에 낀 채 긴 트림을 하는
생고깃집과 제주흑돼지 오겹살집 사이에서
죽은 듯 죽집이 끼어 있다
죽은 후에도 죽은 먹을 수 있을 것만 같다

- 강기원, 「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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