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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그것이 지금이라면

by 장돌뱅이. 2022. 5. 14.

1974년 새해 벽두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과 개정 요구를 금지하고 위반할 때는 최고 징역 15년에 처할 수 있음을 골자로 한 이른바 '긴조(대통령긴급조치)'를 발령한다. 소식을 듣고 김지하는 잠적하여 3개월 동안 여기저기를 전전해야 했다. 이때의 심정을 「1974년 1월」이란 시로 남긴다.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 그 시간 /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 /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 / 겁먹은 얼굴 /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 그토록 어렵게 / 사랑을 시작했던 날 / 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 / 두려움을 넘어 / 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 바라보던 날 그 날 /  그 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 바람 찬 저 거리에도 /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 /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 언젠가는 터져 나올 그 함성을 / 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 /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 저 모든 눈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 아아 1974년 1월의 죽음을 두고 /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 온몸을 흔들어 /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네 손과 / 내 손에 남은 마지막 / 따뜻한 땀방울의 기억이 / 식을 때까지 

같은 해 4월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사건'을 발표한다. 이와 함께 '긴조 4호'가 발령되며 김지하는 지명수배된다. 그리고 4월 25일 새벽 영화「청녀(靑女」의 촬영팀이(김지하는 조감독) 묵고 있는  흑산도 숙소에서 체포된다. 박정희 정권과 '긴조'라는  '어두운 시대'가 그의 등에 또 한 번의  '예리한 비수를 꽂은' 것이다.

정보부 6국의 저 기이한 빛깔의 방들.
악몽에서 막 깨어나 눈부신 흰 빛을 바라봤을 때의 그 기이한 느낌을 언제나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저 음산하고 무뚝뚝한 빛깔의 방들. 그 어떤 감미로운 추억도 빛 밝은 희망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 무서운 빛깔의 방들. 아득한 옛날 잔혹한 고문에 의해 입을 벌리고 죽은 메마른 시체가 그대로 벽에 걸린 채 수백 년을 부패해 가고 있는 듯한 환각을 일으켜주는 그 소름끼치는 빛깔의 방들. 낮인지 밤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언제나 흐린 전등이 켜져 있는 , 똑같은 크기로 된, 아무 장식도 없는 그 네모난 방들 ···(중략)··· 그 방들 속에 갇힌 채 우리는 열흘, 보름 그리고 한 달 동안을 내내 매 순간순간마다 끝없이 몸부림치며 생사를 결단하고 있었다.
- 김지하의「고행-1974」중에서 -


김지하는 민청학련에 자금을 전달하고 배후조종을 한 혐의로 제1심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김지하는 재판 과정에서 "현 정권은 무너지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진술한다. 이후 국방부장관의 확인 과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약 10개월 만인 1975년 2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출감한다. 이때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한다.

"종신형을 받았는데 벌써 나오다니 세월이 미쳤든지 내가 미쳤든지, 아니며 둘 다 미쳤든지 뭔가 이상하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한다고 해서 가혹한 탄압을 한 뒤 이제 석방한다는 것은 돼먹지 않은 호도책이다." 

1975년 2월15일 밤 형집행정지로 영등포형무소에서 출옥하는 김지하

그러나 김지하는 석방 27일만인 3월 13일 처가인 소설가 박경리의 집에서 나오다가 중앙정보부원들에게 연행되어 다시 구속된다. 정보부가 밝힌 구속 사유는 '출옥 후 내외신 기자 회견과 (동아일보에 3회에 걸쳐 연재한) 「고행-1974」에서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등 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하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했다'는 혐의였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나는 공산주의자이다'라는 고백으로 시작되는 김지하의 자필진술서를 공개한다. 

김지하는 이를 반박하는 「양심선언」을 비밀리에 작성하여 일본의 「카톨릭 정의와 평화협의회」를 통하여 8월 4일 동경에서 발표한다. 「양심선언」의 작성과 전달, 발표까지는 교도관과 변호사, 그리고 가톨릭 신부등의 헌신적인 희생과 노력, 긴박하고 기발한  과정이 있었다. 저들의 상투적인 용공조작에 대하여 김지하는 이렇게 적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모략이 지금 나에게 들씌워지고 있다. 박정권의 억압자들은 나를 가톨릭에 침투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민주주의자로 위장한 공산주의 음모가로 몰아 투옥하였다. 이제 나를 교활 음험한 공산주의자로 영원히 그리고 합법적으로 낙인찍기 위한 재판놀음이 벌어질 것이며, 그 결과 나는 이 땅에서 만들어진 그 숱한 관제 공산주의자의 대열에 끼게 될 것이다. ···(중략)··· 어제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닌 이 지긋지긋한 반공법 제4조의 상투적·견강부회적·무차별적·모략적 적용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정신적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아온 최대의 질곡이며, 우리 민중으로부터 말의 자유를 빼앗아 숨막히는 암흑과 침묵의 문화를 보급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부패특권의 압제권력을 유지해 온 최대 억압의 무기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자유의 이름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치떨리는 분노로 항의한다. 나는 나에게 들씌워진 이 더러운 질곡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끝으로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싸워왔는가? 인간을 위하여서이다. 자유롭고 해방된 인간, 신이 창조한 인간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이 과제는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며, 잠시도 늦출 수도 없는 것이다.

당시 박정희가 김지하만은 죽이고 말겠다고 '일본도'를 갈고 있다는 소문이 세간에 파다했다고 한다. 김지하가 처한 실체적 위험을 감지하는 사회적 예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양심선언 이후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김지하 구명과 석방을 위한 움직임이 커져간다. 김지하의 사상과 신앙을 보증하기 위해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을 비롯한 15개국의 신학자 2백여명이 서명했고 이들은 "우리는 이 선언에 나타나고 있는,  고통과 모멸 속의 사람들과 연대를 관철해 나가려는 김지하 씨의 삶의 태도에  깊은 감동을 느끼며, 또한 이 삶의 태도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르친 길이라고 이야기하는 김지하 씨의 주장에 진심으로 동의합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박정희에게 발송한다.

또한 독일 수상이었던 빌리 브란트를 비롯한  사르트르, 촘스키, 오에 겐자부로 같은 저명한 정치인과 석학들이  김지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다. 김지하를 위한 모임이 결성되고 '김지하의 밤'과 '김지하 심포지엄'이 열린다.

1975년 6월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도 제3세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로터스상 특별상>을 김지하에게 수여하면서 "김지하는 현재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이다"라는 견해를 담은 석방요청서를 박정희에게 발송한다.  

결국 김지하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그에게 내려졌던 무기징역에 징역 7년과 자격정지 7년이 더해진 선고를 받는다. 1978년 12월에는 징역 20년으로 감형된다. 이후 1980년 12월11일 전두환정권이 '새 시대 민주복지국가 건설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석방할 때까지 김지하는 5년 9개월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 출옥 후 그의 저서는 상당 기간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김지하  신드롬'이란 말을 낳게 한다.
(*이전 글 참조 : 내가 읽은 쉬운 시 13 - 김지하 )

 출옥 후 김지하는 내게 조금씩 우려와 실망으로 다가온다. '작은 이야기'(小說)가 아니라 '큰 이야기'(大說)을 하겠다는 장시『남(南)』은  온갖 경계를 넘나드는 듯한 거침없는 활발함과 김지하 특유의 현란한  필법은 있지만 시적 소양이 없는 나로서는 이전의 그의 담시가 보여주었던 촌철살인과 시대정신을 읽어내기 힘들었고, 만국활계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의 '깊어지고 넓어진'  생명사상도 추상적이고 사변적이며 모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80년대라는 시대적 긴박함이 더욱 그런 느낌을  들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서정시집 『애린』에서 느껴지는 어떤 산뜻하고 살가운 기운만이 그래도 김지하를 떠올리게 했다. 

 급기야 1991년 젊은이들이 분신으로 외치는 상황에 던진 '죽음의 굿판 집어치우라'는 난데없는 호통은 그의 '변절'과 '투항'을 확신하게 했다. 내겐 실망이라기보다는 아픔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마음 속에 간직해 왔던  저항의 상징이었고, 전설이었고, 신화였던  김지하를 내려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그가 보여준, 세세하게 적을 필요도 가치도 없는,  많은 언행도 그러했다.

며칠 전 휴대폰을 보던 아내가 그가 죽었다고 말해주었다. 순간 가까운 집안 형님의 갑작스런 부음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젊은 시절의 그에 대한 젊은 시절의 나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먼곳에서 그가 자유로운 '새가 되고 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바람이 되길' 빌어본다. 


새라면 좋겠네
물이라면 혹시는 바람이라면

여윈 알몸을 가둔 옷
푸른 빛이여 바다라면
바다의 한 때나마 꿈일 수나마 있다면

가슴에 꽂히어 아프게 피 흐르다
굳어 버린 네모의 붉은 표지여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아아 죽어도 좋겠네
재 되어 흩날리는 운명이라도 나는 좋겠네

캄캄한 밤에 그토록
새벽이 오길 애가 타도록
기다리던 눈들에 흘러넘치는 맑은 눈물들에
영롱한 나팔꽃 한번이나마 어릴 수 있다면
햇살이 빛날 수만 있다면

꿈마다 먹구름 뚫고 열리던 새푸른 하늘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잠시나마 서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네 푸른 옷에 갇힌 채 죽더라도 좋겠네
그것이 생시라면
그것이 지금이라면
그것이 끝끝내 끝끝내
가리어지지 않는다면.

- 김지하,「푸른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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