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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올해의 '첫' 일들

by 장돌뱅이. 2023. 1. 3.

새해 첫날, 특별히 단호하게 어떤 결심을 세우지 않았다. 도전과 성취의 의지를 다지는 대신에 이전부터 해오고 올해도 변함없이 반복할 자잘한 일상들을 잠시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책 읽기, 음식 만들기, 영화 보기, 걷기, 손자들과 열심히 놀기 그리고 그림 그리기 따위.


1. 첫 책
2023년에 읽은 첫 책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 - 서울편』이었다. 올해 아내와 함께 궁궐을 포함하여 서울 시내를 돌아볼 때 그의 답사기를 참고할 것 같다.
하지만 이전의 답사기에 비해 작가의 개인적인 인맥담과 소회가 많아지면서 읽는 재미는 덜 했다.
특히 "인사동3"은 인사동 관련한 유명 인사들의 인명을 단순 나열하는 식이어서 저자에게는 친근감 있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나,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생면부지의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 것처럼 멀뚱하고 지루했다. '강북과 강남:한양 도성밖 역사의 체취'를 그린 다음권(12권)에는 나의 고향 언저리도 포함되어 있어 기대를 해본다.


2. 첫 음식
5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나의 가장 획기적인 변화는 부엌에 서서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 일이다.
은퇴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하루 3끼를 만들고 있다. 아내와 둘이서 사는 단순한 일상에서 식사는 메뉴의 선정에서부터, 준비 그리고 식탁에 앉는 시간까지 오붓함과 다양함을 가져다 준다. 아내와 내가 밀키트와 외식을 가급적 지양하는 이유다. 하지만 몇년을 하다 보니 아내와 딸아이네 가족이 좋아하는 몇 가지 음식을 반복하고 있다. 타성에서 벗어나 올해는 새로운 메뉴 개발을 해볼 작정이다.

담음새(플레이팅)도 더 예쁘게 하고 싶다. 아래 사진 속 올해 첫 음식인 만두전골과 바싹불고기는, 아내는 맛이 좋으니 괜찮다고 해주었지만, 맛 이전에 우선 시각적으로 부실해 보인다.

*만두전골
*바싹불고기


3. 첫 영화
올해 처음으로 본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었다.
감독의 유명세에 그의 영화를 보게 되지만 내가 깊이 공감을 한 영화는 별로 없다.
굳이 기억에 남는 영화를 꼽으라면『친절한 금자 씨』,『아가씨』정도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헤어질 결심』은 형사와 피의자 사이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종종 사랑 앞에서 현실적 기득권을 무장해제하고 냉철함을 '붕괴'시킨다. 스스로를 자학하면서도 '단일한'사랑을 향해 다가서려고 한다. 해준(박해일)이 그렇고 서래(탕웨이)가 그랬다.

배우들의 차분한 연기가 인상적이었음에도 『헤어질 결심』은 이야기 전개의 개연성이 조금 부족하고, 복잡한 구성과 과도한 상징적 대사 따위가 영화에 몰입을 가로막았다. 불가역적 지나감으로 완결을 이뤄야 하는 것이 영화의 특성이라면『헤어질 결심』은 엔딩크레딧이 올라나고 난 뒤에도 여운과는 다른,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뭔가 보완이 필요해 보였다. 비슷한 주제의 홍콩 영화 『화양연화』와 같은 깔끔한 서정과 절제가 아쉬웠다.

'떠나는 곳이지 찾아오는 곳이 아니'라는 영화 속 이포, 그리고 이포의 나날을 감싸는 안개의 정체는 무엇일까?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나 기형도의 시 「안개」 속의 안개와도 비슷한 것일까? 아니면 반대의 의미일까?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 기형도, 「안개」중에서 -

영화가 흔한 세상이다. 딸아이가 넷플릭스에 디즈니, 쿠팡까지 깔아주었다. 특별히 마음먹어야 갈 수 있던 극장의 영화가 책장 속의 책처럼 궁금할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손쉬운 일상이 되었다.




4. 첫 산책
쌀쌀한 날씨를 무릅쓰고 오후 늦게 집을 나섰다. 산책은 오래전부터 거의 매일 해온 일과다. 아내와 나는 걸으면서 묵주기도를 하고, 식사 메뉴를 정하고, 책과 영화 이야기와 손자들 이야기를 한다. 여행 계획도 논의한다. 가끔은 세상에 대해 분노도 하고 흉도 보고 용서도 한다.


5. 손자친구들의 새해 첫 사진
내게 손자들은 '저하'와 친구 사이를 오간다. 잘 어울려 논다. 아내는 정신 연령이 비슷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런 소통이 주는 기쁨이 크다. 새해에도 그럴 것이다.


6. 내 마음 속 오지(奧地)에 딛는 첫걸음
작년 우연한 인연으로 어반 스케치(Urban Sketch) 동아리에 들게 되었다. 그림이라곤 생전 그려본 적이 없어 이른바 '똥손'인 나에 비해 다른 회원들은 대단한 솜씨와 열성을 지니고 있었다. 회원 중의 한 분이 '손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그리라'고 했지만 나로서는 실경을 따라 그리는 것도 벅찬 걸음마 수준일 뿐이다. 우선은 그분 말대로 '그림근육'을 키워야 할 것이다.
내가 그림을 그린다고 나서게 되다니!

마술(魔術)도 비슷하다. 손자저하의 기쁨조가 되기 위해 배운 마술이 어느 틈엔가 어른들 사이의 놀이가 되었다. 머리에 서리가 내린 동년의 사람들과 나누는,
어쩌면 유치할 수도 있는 '장난'이 즐겁다.

그림과 마술.
60년을 넘게 살면서도 내 속에 내가 모르는 오지가 아직도 남아있다. 신기하다.


카톡으로 전화로 인사로 새해가 되면 행복과 건강을 소망하는 인사가 넘쳐난다. 어디 새해뿐이랴. 일 년 내내 우리는 그런 바람 속에 산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다. 다가오는 시간이 늘 짜릿하고 쫄깃쫄깃하지만은 않으며 또한 허무하지도 맹랑하지만도 않다는 것을. 대부분의 시간은 그저 맛이 없는 맹물과 같이 흘러간다는 것을. 어쩌랴. 이런저런 소소한 일상의 갈증을 모아 맹물의 맛을 키우며 한 세상을 건너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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