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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오는 해, 가는 세월

by 장돌뱅이. 2023. 1. 1.

아내와 맥주 한 잔씩을 나누어 마시며 한 해를 보내고 맞았다.  맥주 기운에 피곤이 풀리며 몸이 나른해져 왔다. 지난 며칠 동안 손자저하들과 보낸 시간을 복기했다. 여러 번을 반복해도 아내와 내겐 물리지 않는, 감미롭고 따뜻한 무결점의 기억들.

시작은 1호의 방문이었다. 방문 첫날 1호는 무려 새벽 두 시반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몇 시에나 잠이 들까 지켜보자는 마음으로 채근하지 않고 지켜본 결과였다.

1호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받은 산타의 선물을 자랑하고, 여러 가지 좋아하는 게임과 놀이를 한 번씩 선 보이고 난 후에도 잠자리에 들 마음이 별로 없어 보였다. 결국은 아내와 내가 사정하여 등을 떠밀어야 했다. 그런데도 1호는 아침에 7시가 채 안 되어 일어나 어깨를 흔들었다. 더 자자고 끌어 안으니 1분만 허락하겠다고 숫자를  세었다.

그리고 다시 전날의 모든 과정을 서둘러 반복했다. 
레고 조립, 모두의 마블, 부르오(Buruo) 놀이, 분수(分數)놀이, 낚시게임, 볼링게임에 아내와 나의 참석은 필수였다. 심지어 혼자 하는 컴퓨터 놀이에도 할아버지는 옆에 앉아서 지켜보아야 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추위가 조금 풀린 한낮에는 밖으로 나갔다. 눈썰매장을 갈까 하다가 가까운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놀았다. 그리고 근처 교보문고에 갔다. 1호와 함께  책방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손자에게 수수께끼 책 2권을 사주었다. 1호는 신기한 듯 진열대 사이를 걸어 다니며 이런저런 책을 들춰보았다. 사람이 없는 한쪽 구석에선 갑자기 격렬하게 춤을 추기도 했다. 기분이 좋다는 의미겠다.

이 날도 1호는 지치는 기색 없이 12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지치기는커녕 너무 일찍(?) 잠을 자야 한다며 아쉬워했다. 3박 4일 동안 똑같았다.

1호는 피자> 삼계탕> 볶음밥> 치킨마요> 탕수육으로 우리 집에서 자신의 선호 음식을 정리해 주었다.
딸아이의 표현에 따르자면 피자를 빼곤 좀 '으르신'스러운 입맛이었다.
매번 그랬듯 1호는 이번에도 내가 만든 삼계탕과 치키마요에 엄지를 세워주었다.

1호가 그린 "랍스터 요리"

딸아이가 보던 책을 손자저하에게 읽어주거나 딸아이와 함께 보던 영화를 1호와 함께 다시 볼 때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한다. 내가 할아버지가 되고, 딸아이가 그때의 내 나이가 되고, 다시 손자가 태어나 그때의 딸아이만큼 자랐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해지기도 한다.  1호와 맥컬리컬킨의 「나홀로 집에」시리즈나 더스틴 호프만이 나온 「후크선장」같은 영화를 볼 때 그랬다.

「나홀로 집에 1」은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와 비디오를 빌려 함께 보았고, 「나홀로 집에 2」와 「후크선장」은 인도네시아에 살 적, 자카르타의 한 극장에서 보았다. 그때 딸아이는 초등학교에 신입생이었다. 손자와는 OTT라는, 딸아이의 어린 시절에는 상상도 못 하던 문명의 이기를 통해 본다.
세월이 가져다준 격세지감의 변화다. 

「나홀로 집에 2」에 나오는 커다랗고 화려한 집과 호텔을 보며 1호에게 말을 건넸다.
"너도 나중에 크면 저런 곳에서 살아라. 할아버지가 놀러 가게."
1호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지막지한' 대답으로 나의 희망을 한 방에 무질러 버렸다.
"그땐 할아버지가 아마 죽어있지 않을까요?"
그런가? Who knows? 

초등학교 시절 딸아이가 보던 책

1호와 3박 4일의 일정을 끝내고 간 딸아이네 집에서 2호의 눈물 섞인 격렬한 환영을 받았다. 아내와 딸아이는 손자저하들 사이에서 나의 인기는 가히 아미(ARMY)들 사이에서 BTS급이라고 킥킥거렸다. 나는 1호와 2호의 할아버지 쟁탈전 사이에서 인기란 좋은 것이지만 피곤한 것이기도 하다는 스타급의 기분을 느껴보기도 했다.

딸아이 집에서도 1, 2호와 함께 운동을 하러 외출을 했다.
1호는 스케이트 코너링이 잘 안 된다는 엄살을 부렸지만 사실은 그것을 자랑하기 위함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2호는 자신의 장기인 점프를 곳곳에서 선보이며 나의 관심을 끌었다.

원래 아침에 1호를 데려다주고 오후 2시쯤 집으로 돌아와  쉬겠다는 나의 애초 계획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3시에서 5시로, 다시 저녁 식사 후로, 저녁 식사 후엔······ 끝내 자고 가야 한다는 저하들의 매달림을 물리치고 '탈출(?)'을 하는덴 모진 결심이 필요했다. 아내는 이미 그럴 줄 알았다고 2시에 돌아올 거라는 말은 애초부터 믿지 않았다고 혀를 찼다.

시간 구분의 경계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지난 시간보다 더 나은 미래를 소망한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라거나 올해 보다 나은 내년 하는 식으로.
그럴 때마다 아내와 나는 '어제와 같은 오늘!'을 기도했다. 내가 그 말을 꺼냈을 때 누군가는 '행복하게 사셨다는 뜻이겠지요'라고 해석했다. 나는 아니라고  '그저 욕심을 없애겠다는 다짐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아내와 맥주잔을 부딪치며 새해가 왔다는 걸 조금 늦게 알아차리고 생각해보니 지난 시간이 행복했다는 의미도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의미 건 2023년도 부디 지난해와 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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