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대공원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갈래길 한쪽 야트막한 담장 아래 옛 왕릉에서 보았던 석조물들이 다소 어수선하게 늘어서 있다. 나는 그것을 공원을 찾는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용으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마음대로 추측했다. 그렇다면 좀 더 가깝게 볼 수 있도록 출입을 자유롭게 할 일이지 통제선은 뭐 쳐 놓은 걸까 불만스럽게 여긴 적도 있었다. 문인석이나 무인석의 생김새도 여타의 왕릉과는 달리 유난스레 못 생긴 것도 불만을 부추겼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자주 산책을 가면서도 그냥 무심히 지나치는 곳이었다.
그곳이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척(순종)의 태자비 민씨의 능(陵)이 있던 자리라는 걸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민씨는 열한 살의 나이에 여덟 살의 황태자와 결혼하여 1897년 황태자비로 책봉되었으나 1904년에 33살의 나이로 죽었다. 결혼 22년 만이었다. 이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로 추존되었다. 1926년 순종이 붕어하여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유릉(裕陵)을 쓸 때 순명효황후의 묘도 이장을 하면서 석상과 석물들을 남긴 것이다.
어린이대공원이 자리한 곳의 지명이 능동(陵洞)이라는 것도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순명효황후의 묘가 있기 전 이곳엔 지금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으로 옮겨진 수릉(綏陵)도 있었다고 한다.
엣 골프장 자리였다는 사실만 알고 있던 어린이대공원의 내력에 대해 관심을 가게 된 건 그런 사실을 알고부터였다. 1929년 일제는 이곳에 경성골프구락부(경성골프클럽)를 조성했다. 이후 일제 패망과 한국전쟁으로 패허가 되었던 이곳은 1954년 이승만 정권 시절 서울컨트리클럽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1970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골프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이곳에 어린이대공원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제7대 대통령선거가 코앞인 시점이어서 선거용이라는 말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972년 11월 3일 1만여 명의 어린이와 학부형이 참석한 가운데 육영수 여사와 남녀 두 어린이가 첫 삽을 뜨는 기공식을 가졌고, 51회 어린이날인 1973년 5월 5일 우리나라 최초·최대의 어린이대공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공원 안에는 동물원, 식물원, 실내정원, 수경시설 등과 함께 놀이동산이 있었다. 놀이동산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롤러코스터인 청룡열차가 있어 어린이들만 아니라 어른들의 관심도 끌었다. 그를 증명하듯 개장 첫날엔 무려 30만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정원의 6배가 넘는 규모였다.
지금의 모습은 리모델링을 통해 2009년 5월 5일에 재탄생한 모습이다. 놀이동산도 2014년 8월 재개장하였다. 첨단의 놀이시설을 갖춘 놀이동산이 서울과 수도권에 생겨나면서 테마파크로서 어린이대공원의 위상은 점점 낮아진 듯하다. 그냥 산책하기 좋은 동네 공원일뿐이다.
이린이대공원 분수대 왼편에 개장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글을 새긴 비석이 있다.
비 아래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어린이는 겨레의 희망이요 나라의 보배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는 1970년 12월 4일 이 나라의 앞날을 질머지고 나갈 어린이들이 슬기롭고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이곳 서울 칸트리 구락부 골프장 터에 어린이를 위한 자연공원을 마련하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이 대공원 건설은 이 높으신 뜻에 따라 시작되었으며 1972년 11월 3일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님께서 손수 사랑 어린 기공의 첫 삽을 뜨신 이래 밤낮없이 진행되어 1973년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이곳 복된 땅 능동벌 푸른 들에 뜻깊은 그 첫날은 열리었다. 앞으로 이 어린이 대공원은 그 뜻을 받들어 이 나라 어린이들의 꿈이 피어나는 낙원이 되고 될 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는 메말랐던 동심을 다시 꽃피게 하리라.
좀 오글거리는 글이지만 그 또한 유신 시절의 한 단면으로 읽힌다.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 지원 전에 소학교 교사를 지냈기 때문인지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어린이날을 법정공휴일로 지정한 것도 그의 시대였고, 신년사를 발표할 때 '어린이를 위한 신년 메시지'를 별도로 발표하기도 했다. 육영수 여사의 육영재단을 통해 남산에(나중에 어린이대공원으로 이전한) 어린이회관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어린이 사랑'의 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박정희대통령 내외가 어린이를 내세우며 꿈과 희망의 추파를 던지던 그 무렵,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는 학교에 가야 할 어린 '시다'들이 각혈을 하며 쓰러져 가고 있었다. '고아입양특례법'을 만들어 한 해 5,0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을 해외로 입양 보내기 시작한 것도 박정희 정권 들어서 본격화된 일이다. 즉 정권의 눈 안에 든 어린이는 중산층 가정의 어린이들이었을 뿐, 빈민의 자녀나 고아들은 그저 걸리적거리는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다. 비단 박정희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독재자 대부분은 사진을 찍을 때면 늘 옆에 해맑게 웃는 어린이들을 세웠다. 국민을 향한 자신의 순수한 봉사심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거짓 메시지를 던지기에 어린이만큼 매력적인 '백그라운드'가 없기 때문이다.
- 권기봉, 『다시, 서울을 걷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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