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향을 바꾸는 많은 일들은 갑자기, 느닷없이, 난데없이, 예기치 않게 뒤통수를 후려치며 온다.
열무김치를 담그는 명지에게 낯선 번호의 전화가 전해준 소식처럼.
현장학습 시간에 늦었다고 허둥대며 뛰어가던 남편의 뒷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남편의 장례를 마치고 명지는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떠난다.
한국을 떠나 한 달 동안 비우게 된 자신의 집에서 지내보라는 친척 언니의 배려 덕이었다.
바르샤바에서도 명지의 일상은 한국에서와 다르지 않다. 아니 일상이랄 것도 없이 감각도 멈춰버린 듯한 고요한 시간을 '도랑 위에 쌀뜨물 버리듯 그냥 흘려' 보내며 지낸다.
남편을 잃기 전, 나는 내가 집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지 잘 몰랐다. 같이 사는 사람의 기척과 섞여 의식하지 못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내가 끄는 발 소리, 내가 쓰는 물 소리, 내가 닫는 문 소리가 크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중 가장 큰 건 내 '말소리' 그리고 '생각의 소리'였다. 상대가 없어,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한 시시하고 일상적인 말들이 입가에서 어색하게 맴돌았다. 두 사람만 쓰던, 두 사람이 만든 유행어, 맞장구의 패턴, 침대 속 밀담과 험담,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던 잔소리, 농담과 다독임이 온종일 집안을 떠다녔다. 유리벽에 대가리를 박고 죽은 새처럼 당신의 부재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야 나는 바보같이 '아, 그 사람, 이제 여기 없지······'라는 사실을 처음 안 듯 깨달았다.
- 김애란의 단편 소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중에서 -
명지의 몸에 생겨난 발진은 바르샤바에 온 뒤에도 점점 심해져간다. 스트레스가 원인인 피부병이다. 특별한 치료약이 없어 그냥 참고 견디는 시간이 약이라고 한다. 다 나은 듯해도 쉽게 재발한다는 그 병은 남편의 상실로 인한 상처와 닮아 있다. 남편의 기억은 무심한 순간마다 걸핏하면 되살아나고 그럴 때마다 명지는 다시 깊은 나락으로 꺼져든다.
명지는 광주에서 책방을 한다. 바르샤바에는 오래전 민중봉기로 인한 무고한 희생자들이 많았다고 영화는 전한다. 광주와 바르샤바라는 공간의 공통된 역사 속 수많은 죽음이 떠오른다.(같은 제목의 원작 소설에선 명지가 스코틀랜드의 에든 버러로 떠나온 것으로 되어있기에 영화가 바르샤바를 선택한 것은 어떤 의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죽음은 건조한 숫자로 일반화하거나 평준화할 수 없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이기 전에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상실임에 방점을 두고 싶은 것 같다.
그리고 영화의 또 다른 축인 어린 해수를 통하여 진정한 위로의 의미를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해수는 명지의 남편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고로 친구 지용을 잃었다. 그에게도 친구의 부재는 크지만 해수는 동생을 잃은 충격으로 몸이 마비된 친구의 누나를 정성껏 돌보는 것으로 자신의 슬픔과 우정을 대신한다.
삶은 그렇게 종종 우리를 '갑자기, 느닷없이, 난데없이, 예기치 않은' 곳에 내던져버리곤 한다.
그곳에서 무릎은 꺾이고 꿈은 흐트러져 일상은 방향을 잃는다.
쾌속의 기발한 치유책이 있을 리 없다. 다만 그럴 때 우리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절제가 아니라 슬픔을 토로하는 시공간이다. 그걸 마련해주고 기다려주는 주위의 배려고 예의다. '밥 거르지 말고 먹어'라며 토닥이는 위로는 그다음에 와야 하면서도 동시에 앞선 모든 과정에 포함된다.
결국 '부서진 그 자리에서 다시 살아봐야 하는 것이 숨을 받은 자들의 몫'일 것이므로 명지의 휴대전화 속 음성인식 프로그램이 내놓은 자동 응답이 상투적이면서도 정답으로 다가온다.
"제가 이해하는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이랍니다."
*소설「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소설집 『바깥은 여름』에 들어있다.
앞서 말한 대로 소설에는 바르샤바 대신 스코틀랜드가 나오고, 해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사족이지만 영화는 영화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보면 되겠다.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주 작은 뭐라도 하며 (0) | 2023.11.16 |
---|---|
11월의 서울숲 (0) | 2023.11.15 |
만화『아! 팔레스타인』 (0) | 2023.11.13 |
야구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0) | 2023.11.12 |
독감 릴레이 (0) | 2023.11.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