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프로야구를 결산하는 코리안시리즈가 열리고 있다. 기아나 두산이 아니어서 흥미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응원하는 팀이 있어야 보는 재미가 있으므로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LG를 응원하며 보고 있는 중이다. 프로야구 원년에는 LG 전신인 MBC청룡을 좋아하기도 했으니 억지 응원은 아니다.
'무∼적 LG!'로 올해 야구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야구이야기 몇 개를 떠올려 보았다.
1. 영화 <<낫아웃>>
영화 <<낫아웃>>에서 광호는 고교 야구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결승타를 친다. 스스로 '나 야구 존나 잘한다'며 프로구단 입단을 자신했지만, 자기보다 한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동료가 프로구단의 지명을 받았음에도, 광호는 지명을 받지 못한다. 야구를 지속하기 위해 대학교 진학을 모색해 보아도 그 역시 만만치 않다. 입학 실기 시험에서는 자신을 향해서만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공이 날아오는 등의 현실을 겪으며 광호는 야구 이면에 또 다른 규칙이 작용하는 세상이 있음을 깨닫는다.
감독에게 부탁을 하자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고 한다.
야구에는 공식적으로 삼진 아웃이지만 아웃이 아닌, 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룰이 있다. 원래 이름은 "Strike Out Not Out"이지만 줄여서 "Not Out"이라고도 한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 세 번째 스트라이크로 들어온 공을 포수가 바로 잡지 못하면 (Uncaught Third Strike) '낫아웃' 상황이 된다. 타자는 아직 아웃이 아니기 때문에 1루로 달려 공 보다 먼저 도착하면 살 수 있다. 물론 이론적인 배려(?)일 뿐 타자가 실제 살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프로 입단과 대학입학 경쟁에서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한 광호는 '촌지'의 힘으로 '낫아웃' 되어 야구라는 꿈과 현실 속에 힘겹게 살아남는다. 촌지는 아버지가 생계 수단이던 가게를 정리해서 마련한 것이다. 광호의 꿈은 애절하고 절박하다. 야구의 원칙보다 치밀하고 견고한 야구 뒷세상의 논리와 부조리에 꺽이지 않아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는 '아프니까 젊음'이라는 설교만큼이나 비아냥스럽고 뻔뻔하게 보인다. 그가 가까스로 움켜쥔 '낫아웃'이 희망의 끝자락인지 또 다른 '아웃'의 고리인지 알 수 없다. 우선은 살아남았다는 사실로 안도를 해본다. 젊은 시절 이래 내가 지나온 대부분의 시간도 '스트라이크 아웃 낫아웃'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면서.
2. 박민규의『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오래된 야구팬이라면 프로야구 원년부터 3년 반 동안 존재했던 삼미슈퍼스타즈를 기억할 것이다. 상대팀에겐 승리를 보장해 주는'보약'으로 프로 야구의 거의 모든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창조'해냈던 만년 꼴찌 팀. 시즌 최저 승률(동시에 프로야구사상 최저 승률인 0.188), 시즌 최소 득점, 시즌 최소 타석, 팀 최다연패, 한 게임 최다 피안타, 팀 최다 홈런 허용, 최다 사사구 허용, 시즌 최다 병살타 등등.
프로야구 원년, 우리의 슈퍼스타즈는 마치 지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패배의 화신 같았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오늘도 지고, 내일도 지고, 2연전을 했으니 하루를 푹 쉬고, 그다음 날도 지는 것이다. 또 다르게는 일관되게 진다고도 말할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용의주도하게 진다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더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주도면밀하게 진다고도 말할 수 있고, 쉽게 말하자면 거의 진다고 할 수 있겠다.
일류대를 졸업하고 자신만만하게 '프로'의 세상에 뛰어든 소설의 주인공이 데드볼을 맞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IMF경제 위기에 그간에 쌓아 올린 공든 탑이 허망하게도 간단히 정리해고를 당한 것이다.
설상가상 아내는 이혼을 요구해 왔다.
그저 평범하게 열심히 살았을 뿐, 별다른 변화구나 볼배합, 아니면 주변 동료들에 대한 특별한 공격 타법을 장착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의 변화와 새로운 규칙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프로'의 세상에 '삼미슈퍼스타즈' 같은 '평범함'은 설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이해와 위로는 잠깐이었고 곧이어 '치기 어려운 공은 치지 않고 잡기 어려운 공은 잡지 않는' 개인적인 나태와 판단력 부족이 불러온 당연지사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생각해 보니, 내 인생은 과연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평범하고 평범한 가문의 외동아들이었고, 거의 이대로 평범하고 평범한 가문의 아버지가 될 확률이 높은 인생이었다. 타율로 치며 2할2푼7리 정도이고, 뚜렷한 안타를 친 적도 없다. 발이 빠른 것도 아니다. 도루를 하거나 심판을 폭행해 퇴장을 당할 만큼의 배짱도 없다. 이대로 간다면······ 맙소사, 이건 흡사 삼미슈퍼스타즈가 아닌가.
그날 밤 나는 새로운 사실을 한 가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그저 평범하다고 생각해 온 내 인생이 알게 모르게 삼미 슈퍼스타즈와 흡사했던 것처럼, 삼미의 야구 역시 평범하다면 평범하달 수 있는 야구였단 사실이다. 분명 연습도 할 만큼 했고, 아타도 칠 만큼 쳤다. 가끔 홈런도 치고, 삼진도 잡을 만큼 잡았던 야구였다. 즉 지지리도 못하는 야구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야구를 했다는 쪽이 확실히 더 정확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 평범한 야구를 했던 삼미슈퍼스타즈.
결국 문제는 ‘평범’의 기준에 관한 것이다. 과연 어떤 것이 평범인가? 거기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도 전에, 1980년대의 세상은 3위 MBC청룡과 4위 해태 타이거즈를 하나로 꽉 묶어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낸다.
중산층.
바로 중산층이다. 이 파워풀한 단어는, 그 후 세상을 바꿔나가는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작용한다. 이 하나의 단어로 인해, 이제 확실히 도표의 3, 4위가 새로운 평범의 기준이 된 것이다. 무진장 노력하고, 눈 코 뜰 새 없이 노력하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
"남들 사는 만큼 사는 거죠."
"그저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죠."
라고 말하는 이상한 세상이 온 것이다.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돌이켜보면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은 채, 자신만만 경쟁은커녕 삼미슈퍼스타즈와 같은 0.188의 최저 승률로, '스크라이크 아웃'이어도 그저 힘을 다해 1루까지 뛰고 보는 '낫아웃'으로 한 세월을 건너왔다는 점에서 나는 소설 속 주인공과 닮은 점이 많다. (일류대학을 나오지 않은 이력은 그와 다르지만.)
세상이 정한 평범의 기준에 단 한 번도 이르지 못했으면서도 애인이 되고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것이 내 나름의 지혜로운 처신의 결과라도 되는 양 뿌듯해지다가도 '낫아웃'이라 행운에 이은 가족의 '희생번트'가 있었음을 깨닫곤 한다.
이제는 '치기 어려운 공은 치지 않고 잡기 어려운 공은 잡지 않는' 것이 아이라 칠 공이나 잡을 공도 없다. 여전히 세상의 기준에 못미친 평범의 빈 손이어도 허허롭지 않아 감사한다.
앞으로도 아내와 함께 어린 손자들의 손을 잡고 이제까지 걸어온 대로 걸어가고 싶을 뿐이다.
우리가 짐을 푼 곳은 (···) 해변 마을이었다. 보기에 따라 아름다울 수도, 생각하기에 따라 그저 그럴 수도 있는 한적한 시골이다. 작은 학교가 있고, 작은 우체국이 있고, 작은 농협이 있고, 작은 집들이 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논과, 하늘과, 바다가 있다. 논은 지구의 일부였고, 하늘은 은하계의 일부였고, 바다는 태평양의 일부여서―학교와 우체국과, 농협과 집들은 더욱 작아 보인다. (···) 무엇이 있냐고 물으면 곤란하다. 그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같은 소리를 한다면 할 말이 없다. (···) 아름다움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해가 지면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는 것이었다. 즉 24시간 운영, 연중무휴, 연장 근무, 불철주야, 철야 근무 같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해가 뜨면 마을 사람들은 일을 시작한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다. 뛰어다니는 것은 개들뿐이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해가 지면 잠을 잔다. 쿨쿨 잔다. 여러분이 잠든 이 시간에도 이웃 면에서는 다수확 신품종의 벼 모종 보급을 비밀리에 착수, 내년의 수확 경쟁에서 한 발 앞서가면 어쩌지요?라고 물어봐야 소용없는 짓이다. 그렇다면 경쟁에서 앞선 이웃면이 그 돈으로 국내 최대, 국내 최초의 농지형 테마파크를 국내 최초로 건립해버리면 어쩌지요? 라고 해봐야 그러거나 말거나다. 이곳은 무엇이 들어와도 국내 최후이며, 삶의 분주함으로 따지자면 국내 최저이며, 그 어귀에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동네 사우나탕 정도의 규모를 지닌 국내 최소의 해수욕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함없이 해가 뜨면 일을 시작하고, 할 만큼의 일을 하고, 먹을 만큼의 밥을 먹고, 해가 지면 잠을 자는 것이다. 글로 정리하고 보니 마치 삼미슈퍼스타즈의 야구 같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는 이 글에 언급한 세 가지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3. 김유원의 소설, 『불펜의 시간』
불펜(Bull-pen)은 투우장에서 소들이 대기하는 우리에서 비롯된 말로 야구장에서 구원 투수가 경기에 나가기 전 몸을 풀며 연습을 하는 곳을 말한다.
결전을 대비하는 장소라고 하면 너무 묵직해지려나?
『불펜의 시간』에는 세 명의 젊은 '삼미슈퍼스타즈'가 나온다.
같은 야구 선수였던 친구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승부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투수와 회사의 조직의 논리에 괴로워하다가 사직을 하게 된 회사원, 그리고 기자의 소신을 지키려고 부당한 대우를 감수하는 기자.
그들이 묻는다.
"이기는 게 중요할까? 얼마나 중요할까? 무엇보다 중요할까?"
세상이 그들에게 '낫아웃'이라는 작은 통로라도 만들어줄 거라는 기대를 갖기는 어렵다.
영화 <<낫아웃>>의 광호처럼 절박하게 세상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려는 젊음이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선택이 최선이었는가에도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래도 '변화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가져오는 것' 아닐까?.
물론 그 변화의 짐을 젊은(혹은 어린) 사람들에게 지우는 게 가혹해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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