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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아주 작은 뭐라도 하며

by 장돌뱅이. 2023. 11. 16.

요즈음 아내는 손자저하들을 보러 갈 때면 바빠진다. 1호저하가 요구한 음식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1호가 좋아하는 음식은 갈비찜, 만둣국, LA양념 갈비 등이다.
얼마 전까진 내가 만든 등갈비강정이나 삼계탕을 좋아했는데 요즈음은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갔다.

아내가 만든 음식을 1호는 저녁으로 먹고 잠자기 전에 또 먹는다.
그리고 아침으로도 먹고 싶어 한다. 반복해서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고 한다. 
아내와 나는 어릴 적 비슷했던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딸아이가 손자 나이 때 한동안 비빔밥의 매력에 빠져 지냈다. 자주 가던 고깃집에서 전주식 비빔밥을 냈는데 한 번 맛을 본 뒤로는 그 좋아하던 고기도 마다하고  비빔밥만 찾았다. 아내와 난 그때 속이 니글니글 해질 때까지 비빔밥을 먹어야 했던 탓에 그 뒤로는 비빔밥을 이전처럼 찾지 않게 되었다.

1호가 좋아하던 흑미삼계탕
만둣국
LA갈비

음식에 있어 아내를 물리치고 다시 주도권을 회복하기는 쉬울 것 같지 않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종합적인 면에서 손자저하들의 나를 향한 인기는 아직은 넘사벽이기 때문이다.
1호와 장기와 바둑을 두고, 공기놀이를 하고, 마술을 하고······ 또 잠을 같이 잔다.


잠자리에 누워 요즘은 자주 끝말잇기를 한다. 장기나 공기놀이처럼 내가 일부러 져주지 않는데 끝말잇기에서 저하를 이기기가 쉽지 않다. 저하는 영특하게도 몇 가지의 함정 단어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기' 자로 끝나는 말은 피해야 한다. 곧바로 저하가 '기쁨'이라고 받아치기 때문이다. 우리말에 '쁨'으로 시작하는 말은 없다.

'사'로 끝나는 말은 '사슴'으로 되치기를 당하곤 했는데 그 뒤에 내가 '사슴'이라고 하니 '슴슴'이라고 잇는다. '슴슴하다'는 있어도 '슴슴'은 없다고 하니 어디서 들었는지 '음식 맛이 짜지도 싱겁지도 않음'이라고 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슴슴하다'는 싱겁다는 뜻으로 '심심하다'가 규범표기라고 나와 있다. 나는 '슴슴하다'를 평양냉면 맛을 표현하면서 처음 알았다.
그럴 때 '슴슴하다'는 단순히 '심심하다'가 아니라 저하의 설명에 더 가까울 것 같기는 하다.

2호는 늘 온 집안의 방마다 돌아가며 나는 불을 끄고 갇히거나 다친 사람들을 구한다.
나는 도와달라고 긴박하게 전화를 해야 한다. 놀이는 진화하는 법이어서 요즈음은 불을 끄러 달리던 소방차(이름이 프랭크 아니면 로이)와 구급차(이름이 앨리스 혹은 앰버)의 바퀴가 문제가 생겨 수리를 하고 출동한다. 나는 더욱 긴박한 목소리로 구조를 외쳐야 한다.
물론 도중에 전혀 예상치 못한 공사장 놀이로 건너뛰기도 한다.
놀면서 정리하는 식으로 뒤를 따라다니지만 그 부산함과 어질르는 걸 감당하기 힘들다. 

"나는 할아버지가 너무 좋아!"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2호가 어제는 저녁을 먹다가  뜬금없는 말로 모두를 웃겼다.
"할아버지도 나랑 노니까 재미있지?" 
'답정너'의 물음이다.

손자 '서로'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사흘 동안 농사일, 쉬기로 했다

산밭에 괭이질을 하다
지렁이 한 마리라도 찍으면 마음이 짠하니까
삼 주 동안 좋아하던 술도 끊기로 했다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
다른 사람 마음 아프게 하면 안 되니까
석 달 동안 채식을 하기로 했다
손자 서로가 살아갈 세상이
조금 더 맑아질 테니까

- 서정홍, 「작은 다짐」 -

손자가 살아갈 세상이 조금 더 맑아지기 위해 난 뭘 해야 하나 잠시 생각을 해본다.
아주 작은 뭐라도 하며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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