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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by 장돌뱅이. 2023. 12. 20.

총동창회처럼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의 번잡함과 형식적인 '위하여'에 언제부터인가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수다스런 '추억팔이'의 감정 소모보다는 평소 자주 만나지 못해도 정서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들 몇 명과 함께 두런두런 편안한 이야기를 나누는 단출한 송년 모임이 좋아졌다. 
하기 싫은 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신선'이 바로 백수 아닌가.
중학교 동창이면서 동시에 대학 동창인,
반백 년이 넘게 한결 같이 조용한 성품의 친구와 만났다.

내게 부암동의 식당 "소소한 풍경"은 그런 모임에 적당해 보인다.
너무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분위기가 그렇고 큰 기교를 부리지 않고 수수한 음식이 그렇다. 특히 오늘 가지탕은 처음 먹어보는데도 익숙한 맛이었고 그러면서도 신선한 아이디어의 음식이었다.

가지탕

식사를 마치고 가까운 곳에 있는 김환기미술관으로 <<김환기, 점점화(點點畵) 1970-74>> 를 보러 갔다. 김환기의 미술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은 그가 한국 근·현대 추상 미술의 선구자이자 대가이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매혹적인 이름을 붙인 그림이 있다는 정도다. (그 그림의 원제는 <16-IV -70#166>이다. 김환기는 언제부터인가 그림을 그린 날짜와 고유 번호를 제목으로 삼았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 나오는 구절이자 듀엣 가수 유심초의 노래로도 알고 있어 친근한 구절이다.
김환기는 정지용, 서정주, 노천명, 김광섭 같은 문인들과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우리가 그의 추상화에서 느끼는 어떤 맑은 서정은 어쩌면 그런 교류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 아닐까?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 -70#166> (부제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내 작품은 공간의 세계란다.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어쩌면 내 맘속을 잘 말해주는 것일까.
그렇다. 내 점의 세계···.
나는 새로운 창을 하나 열어주었는데
거기 새로운 세계는 안 보이는가 보다. 오호라···.(1970년 1월 8일)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환해지는 우리 강산···. (1971년 1월 27일)

이런 일기를 시작으로 김환기의 작품은 본격적인 점화의 시대를 열어 1974년 죽을 때까지 '다양한 형태의 점과 화면 구성 그리고 빛깔들을 남겼다.'
무수한 점 하나하나는 두고 온 고향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의 표시인지도 모르겠다.

김환기의 그림은 부인 김향안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시인 이상과 짧은 결혼 생활 끝에 사별을 한  김향안(본명 변동림)은 김환기와 재혼을 하여 파리와 뉴욕 생활을 함께 했다. 김향안은 파리에서 미술사와 미술 평론을 공부하여 귀국 후에 이화여대 교수직을 제안받기도 했고,『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파리(巴里)』등의 책을 낸 문필가이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김환기의 부인으로 그의 예술 생활을 뒷바라지하며 평생을 보냈다. 

김환기 전시 포스터 실

내가 미술관에 가는 이유는 절에 가는 이유와 비슷하다. 부처님을 잘 알아서(알아야) 절에 가는 것이 아니듯이 미술관도 그렇다. 그냥 그곳에서 천천히 거니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림에 대해 잘 알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절과 주변 풍경을 바라보 듯 벽에 걸린 그림에 그때그때 떠오르는 나의 생각을 여과시켜보는 적막하고 호젓한 시간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럽다.   

미술관을 나오니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커피숖에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자식들과 손자,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나누었다.
빠질 수 없는 건강 이야기. 세월에 쇄락해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늘 건강하자고 다짐을 하듯 서로에게 덕담을 건넸다. 창밖으론 쉬지 않고 요란스럽지 않은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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