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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워비곤 호수'와 작별 하기

by 장돌뱅이. 2023. 12. 18.

ㅡ 아빠, 저게 뭐야?
ㅡ 크리스마스 트리야.

ㅡ 와 예쁘다!

나도 세상에 대고
저것······ 저 예쁜 것······ 저게 뭐야? 와, 예쁘다!
탄성 지르고 싶구나
그러나 아빠의 손을 뿌리치고 병에서 튀어나간 병마개처럼 세상으로 뛰쳐나온
그날 이래 내 몸에 발 들여놓은 세월, 아무것도 아니게 흘러들어와서는 손쓸 수 없이 눌어붙어버린
그 세월이 목청을 빠져나오지 않는다
세월은, 이 목 안 깊이 늘어진 기다랗고 녹슨 추였던가 보다

- 이선영, 「그러나 세월이」-

일요일 오후 2시까지 손자저하들을 보러 가기로 해서 느긋하게 오전을 보내고 있는데 화상전화가 왔다. 저하2호가 좋아하는 키즈카페도 안 가고 할아버지를 만나겠다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저하의 명을 '받자옵고' 허겁지겁 준비를 해서 길을 나서야 했다.
가는 도중에 딸아이가 카톡을 보내왔다. 저하가 영상통화를 끊자마자 의기양양 말했다는 것이다.
"내 말이 맞지? 할아버지가 빨리 온다고 했지?!"

저하는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짜잔~!' 하며 (자신이 생각하기에) 신기한 것들을 제시하며 나의 주목을 끌려고 한다. 나의 발걸음과 수고로움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된다는 듯이 자부심도 들어있다.

이번엔 크리스마스트리였다. 당연히 제 엄마가 마련했겠지만 저하는 반드시 자기도같이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크리스마스 트리 속 반짝거리는 점등 스위치를 올리고 징글벨 노래와 함께 춤추는 곰 인형을 작동시켰다. 그럴 때마다 나는 놀라움을 과장한 표정을  지으며 신기해했다.

그리고 나서야 늘 하는 "로보카 폴리"와 "날아라 슈퍼윙즈" 놀이로 돌아갔다.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들이지만 놀이는 그 인형들에 한정되지  않는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 놓여 있는 모든 것이 놀이 도구가 되고 놀이터가 된다.
소파, 침대보, 책상, 공, 구슬, 거실, 방 등 모든 것이 그렇다.
아이들만이 가지는 축복이고 능력이다. 

미국의 작가 게리슨 케일러는 모두가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는 가상의 '워비곤 호수' 마을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기가 한 집단에서 평균 이상이면 누군가는 평균이나 평균 이하가 있어야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자주 이런 인식의 오류를 지닌 채 산다고 풍자한 것이다.
나의 운전 실력이나 매너가 평균 이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라떼'나 '꼰대'의 정도를 자평하는 일도 그런 오류에  쉽게 빠질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냉철한 '자기 객관화'가 필수겠다. 육체와 정신의 노화는 함께 오기 쉽지만 육체의 탄력은 사그라들어도 자기 갱신의 노력을 쉬지 않으면 정신의 퇴화는 막을 수 있다.
어린 저하들의 순수함에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어우러져 노는 것으로 최소한 감성과 상상이 메말라 가는 속도는 조금 늦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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