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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주말 '먹방'

by 장돌뱅이. 2024. 6. 3.

토요일 점심 무렵 지하철 2호선에서 야니님을 만났다.
야니님은 처음에 여행동호회에서 알게 되었다.
'야니'는 그곳에서 쓰던 그의 아이디다.
내가 미국에 근무할 적에는 그와 그의 아내가 언어 연수를 와서 일 년 가까이 같은 도시의 가까운 거리에서 이국 생활을 하기도 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내가 광화문 근처에서 근무할 땐 그가 마침 시청을 담당하는 (신문)기자여서 점심시간에 자주 만나 식사를 하고 덕수궁을 산책하기도 했으니 꽤 오래된 인연이다.


그와 만나는 시간은 한마디로 편하다.
일상의 자잘한 이야기를 숨김없이 나눈다. 세상 보는 시선도 대체적으로 같다.
약간 나이 차이가 있고 그는 꼼꼼한 반면 나는 덜렁거리는 성격의 차이가 있지만 군사 독재 시절을 지나온 경험까지 비슷해 어떤  정치 세력이나 인물을 응원하거나 탄식하거나 씹어댈 때  종종 '굳건한 연대감'을 형성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야기를 하든 꼭 논리적으로 정연하거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그는 부산 출신답게 그곳 사람들의 소울푸드라 할 돼지국밥을 좋아하고 나 역시 그래서, 아내를 동반하지 않고 우리끼리 만나는 날의 식사 메뉴는 늘 돼지국밥이다.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으나 시청역 근처 순대국집은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포기를 해야 했다.
대신에 먹은 애성회관의 한우곰탕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맑은 국물은 담백하면서도 구수했고 고기는 부드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덕수궁을 바깥쪽 '고종의 길'을 따라 돌았다. 그도 나도 여러번 걸은 길이다.
생각은 풍경 속에 있다고 했다. 같은 길을 반복해서 걷는 일은 같은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일이다.
그러나 같은 장소도 풍경은 늘 다른 법이라 우리는 같은 생각이라도 새롭게 곱씹어 보게 된다.

덕수궁 주변 풍경에는 어디를 보아도 우리의 근현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눈을 두는 곳마다 해묵은 이야기가 흔하게 스며 있다.
서사가 있다는 것은 기능적이고 세련된 신도시가 따라올 수 없는, 오래된 도시 서울의 강점이다.
서사가 밥 먹여주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세실극장 옥상 세실마루 풍경
세실마루에서 본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영국대사관 옆 덕수궁 길
일제강점기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
정동교회

야니님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만났다. 동대문 쇼핑몰에서 아내의 옷가지를 몇 개 샀다.
아내는 오래간만에 오니 마음에 드는 옷이 많다고 즐거워했다. 젊었을 땐 지리산 종주보다 쇼핑하는 아내 뒤따라 다니기가 더 힘들다고 투덜거리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나도 덩달아 즐거워진다. 

부부지간에 힘의 균형이 아내쪽으로 기울어지는 노년의 상황에 '적자생존'하기 위한 나의 선택이라면 좀 치사해 보일 수도 있으니  점잖게 세월과 나이 덕분(탓?)이라고 해두는 게 좋겠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 준비를 했다.
베란다 화분에 내가 농사짓는 물만 주는 상추를 뜯고 고기를 구워 쌈을 싸 먹기로 했다.
아무래도 상추 양이 적은 것 같아 양배추를 삶았다. 그리고 들깨양념으로 버무린 파채를 만들었다.

일요일 아침엔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토마토, 바나나, 사과, 양파를 썰고 달걀을 부쳐 각자가 필요한 만큼 잼을 바른 식빵 사이에 넣어 먹는 방식이다. 음악을 틀고 커피와 함께 샌드위치를 먹으니 외국의 어느 호텔 식당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엔 수수부꾸미와 메밀국수를 먹었다.
내가 만든 것은 아니고 배송 주문한 밀키트다. 내가 한 일은 지지거나 끓여 상차림을 한 것뿐이다.
이름난 음식점에서 만든 것이니 맛은 좋았다.
이제 6월이다. 찬 육수에 말아먹는 메밀국수는 아내가 좋아하는 여름음식이다. 

수수부꾸미
메밀국수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산책. 걸으면서 묵주기도를 했다.
호숫가에 핀 장미는 어느덧  정점을 지난 듯 꽃잎에 탱탱함이 사라지고 있었다.
조만간 하얀 밤꽃의 비릿한 향기가 숲을 채울 것이다. 

저녁은 애호박을 채 썰어 전을 만들고 어묵탕을 끓였다.
두 가지만으로 배가 불러 밥은 생략하기로 했다.

애호박전
어묵탕

며칠 전 TV를 보던 중 갑자기 아내가 파스타가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집 근처 식당 "매드포갈릭"에 가는 대신 집에서 만들어주겠다고 이룡일 산책 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왔다. 아내는 '꼭 그렇게 백수 티를 내야 하느냐'고 놀리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책에는 처음 본 소스와 재료, 어려운 조리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다양한 종류의 파스타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내 실력에 적당한 레시피를 골라 쉬운 것부터 만들어볼 작정이다. 음식은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 사이에 신뢰와 소통을 깊게 하고 삶의 만족감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매개체다.
아내와 나만의 '먹방'이 필수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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