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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찬밥이건 더운밥이건 2

by 장돌뱅이. 2024. 6. 6.

오후 일과는 손자저하1호의 하굣길에 마중가는 것이다.
교문에서 기다리는데 며칠 전에 같이 놀아 얼굴이 익은 한 아이가 다가와 인사를 하며 "제가 놀이터에서 기다린다고 (저하에게) 전해주세요."라고 말을 하곤 저만치로 달려간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다. 그럴 바에야 같이 나오면 될 일인데 · · · · · ·

잠시 후 휴대폰 삼매경에 빠진 저하기 나타난다.
제 부모도 아내와 나도 걸어다니며 휴대폰 하지 말라고 매번 주의를 주지만 여전하다.
말 안듣기.
세상 모든 자식들의 공통점이다.
휴대폰을 보다가 나를 지나친 후에야 어리둥절해서 나를 찾느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어깨를 툭 치자 깜짝 놀라더니 웃으며 적반하장의 반격을 한다.
"왜 숨어 있었어요?"
그리곤 친구의 말을 전하자 '빨리 오세요' 하며 바로 뒤로 돌아 뛰어간다. 보아하니 집에 들르지 않고 놀이터에서 놀다가 바로 학원차를 탈 생각으로 아침부터 가방을 꾸려온 것 같다. 

놀이터에선 가급적 좁은 틈새와 가파른 경사, 높다란 철책 따위만 골라 친구와 오르내리며 땀을 흘리다간 휴게실에서 친구와 딸기주스를 사달라고 한다. 주스를 마시며 둘이 나누는 이야기는 온통 축구이야기다. 축구팀의 영상을 보며 이건 반칙인데 심판이 휘슬을 불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하다간 손흥민과 싱가포르와 있을 경기 예상도 한다.

얼마 전 우리집에서 저하와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 경기를 볼 때 저하는 골을 먹을 때마다 토트넘의 선수들이 '그렇게 위치를 잡거나 수비를 해서는 안 되는 거'라며 해박한(?) 축구 지식을 과시했다. 그걸 보는 우리들은 '그런 본헤드 플레이를 해도 좋으니 제발 나중에 프리미어 경기장에 서 있기나 했으면 좋겠다'고 낄낄거렸다.  

지난번에 말했듯 나는 손자저하 1호에게 '찬밥'으로 밀려나고 있다.
이제  나는 가방을 맡아주는 당번이고 음료수 값을 지불해주는 비서다.
한 때 열광했던 마술이나 보드게임, 체스나 장기 따위 내가 마련한 아날로그 관심거리는 친구들과 하는 축구와 인터넷게임에 밀려 있다.


하지만 나는  '권토중래'를 꿈꾸지 않는다.
지금도 내가 저하에게 관심 서열 1위여서는 곤란한 일이지 않는가.
날마다 자라는 저하에 걸리적거리지 않게 가방을 맡아주고 음료수 값이나 지불해 주면 될 일이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흐뭇한 일이 있다는 걸 손자저하를 보며 깨닫는다.

*🎵Music provided by  브금대통령  🎵Track : Believe in Yourself 

4년 터울의 2호저하는 아직 '할아버지바라기'다.
2호도 결국 1호의 전철을 따라가겠지만 그건 4년 뒤의 일 아닌가.
4년이라면 어릴적 세뱃돈으로 두둑해진 호주머니처럼 든든한 '더운밥'의 시간이다.
"어린이집 버스 서는 그 자리에 할아버지가 딱 서서 기다리고 있어요."
요즘들어 한층 더 말이 영글어진 2호저하의 엄명이다.

*🎵Music provided by  브금대통령  🎵Track : Believe in Yourself

요즘엔 자전거를 배우느라 저하와 집에서 제법 먼 공원까지 연습 삼아 다녀오기도 한다.
그런 날에는 무한체력인 줄 알았던 저하도 지쳤는지 전에 없는 낮잠을 자기도 한다.

저하들은 내게 아래 시 속의 수달이거나 이중섭 그림 속의 아이들이다.

달뿌리풀이 물별 뜬 강물을 향해
뿌리줄기로 열심히 기어가는 습지입니다
모래 위로 수달이 꼬리를 끌고 가면서
발자국을 꽃잎처럼 찍어놓았네요
화선지에 매화를 친 수묵화 한폭입니다
햇살이 정성껏 그림을 말리고 있는데
검은꼬리제비나비가 꽃나무 가지인 줄 알고
앉았다가는 이내 날아갑니다
가끔 소나기가 버드나무 잎을 밟고 와서는
모래 화선지를 말끔하게 지워놓겠지요
그러면 또 수달네 식구들이 꼬리를 끌고 나와서
발자국 꽃잎을 다시 찍어놓을 것입니다
그런 밤에는 달도 빙긋이 웃겠지요
아마 달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날은
보나마나 수달네 개구쟁이 아이들이
매화 꽃잎 위에 똥을 싸놓고서는
그걸 매화 향이라고 우길 때일 것입니다

- 공광규, 「병산습지」 -

아래 그림은 이중섭의 그림 <두 어린이와 사슴>과 <해초와 아이들>을 보고 내가 어설프게 흉내를 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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