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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미안한 하루

by 장돌뱅이. 2024. 6. 8.

아내가 병원에 가는 길에 동행을 했다.
다행히 큰 이상(異常)은 없다고 의사는 말했다.
하지만 작은 이상도 이상이고 이유를 알지 못하는 증세도 이상이다. 모든 게 늙어서 생기는 거라고 , 늙어서 생기는 모든 비정상은 정상이라고 남에게 농담처럼 건네기도 하고 나 자신에게도 다짐해보지만 내공이 깊은 도사가 아닌 다음에야 쉽게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지는 않는 법이다.

병원은 온갖 부위가 아픈 온갖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힘든 예약을 통과해도 진찰은 대기, 검사도 대기, 심지어 병원비 내는 것도 번호표를 뽑아 기다려서 내야 했다. 아내의 손을 잡고 병원 내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나는 그냥 마냥 하냥 미안했다.

미안하오
새벽 세 시 십사 분에 미안하오  

웃게 하다 울게 하고  

너무 많은 일을 같이해  
하는 일마다 생각나게 해서  

그대가 지은 밥을  
맛있게 먹은 기억을 남겨서  

으스러지게 안아서  

사랑해서
미안하오  
낮 열두 시 삼십이 분에 미안하오  

-  나해철, 「미안하오」-


"당신이 뭐가 미안해?"
아내가 의아한 어투로 말했다.
'이럴 때 미안하다는 건 사랑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야',라고 시인 흉내를 내보았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새벽 세 시 십사 분에도 낮 열두 시 삼십이 분에도 미안한 거라고. 

그래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병원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아내의 식성을 고려하고 구글을 뒤져 선택한 식당이었지만 음식은 특별나지 않고 무난한 정도였다.
한번은 가볼 만하다는 건 한번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속설에 걸맞은 식당이라고 해야 할까?

벽에는 이름난 사람들의 사인과 사진이 걸려있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나는 또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웃었다.

한 때 '식후 3분 이내 흡연'이 헌법적(?) 의무이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담배 대신 커피가 그렇다.
식당 선택의 미안함을 만회하기 위해 분위기 좋은 카페를 골라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계동에 있는 카페 onion.
결론부터 말하면 여기도 미안한 곳이었다.

"계동 onion" 입구

"카페 onion"은 성수역 근처에 처음 생겼을 때부터 아내와 자주 가던 곳이었다.
폐공장을 개조하고 일부분은 그대로 살려 만든 카페는 특이했고 개방감과 안온함이 공존했다.
거기에 커피와 빵도 맛이 좋아서 산책의 마지막 코스로 잡곤 했다.

*이전 글 :

 

잘 먹고 잘 살자 43 - 성수동 카페 "ONION"

성수동은 이런저런 작은 공장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다. 최근 홍대나 연남동, 혹은 건대입구역 먹자골목이 포화 상태에 이르러 비싼 임대료에 밀린 상권이 대체 지역을 모색하는, 이른바 젠트리

jangdolbange.tistory.com

그런데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바람에 뜸하게 가게 되었다.
근래엔 여러 나라의 외국 젊은 여행객들까지 많이 찾아 어느 때 가도 번잡하다.

2019년에 생긴 계동 onion은 처음이다.
평일 식사시간도 지난 때이니 좀 한적하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젊은 외국 여행객들이 긴 대기줄을 만들고 있었다. 아내를 의자에 앉혀두고 내가 그 줄에 꽁무니에 섰다.

음식점에서 기다리는 일은 예전엔 절대 하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유명 음식점도 단 1분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몇 번 기다려본 적이 있다.   
나이 들어 성격이 느긋해져서가 아니라 단지 장소를 옮겨가는 게 귀찮아진 게으름 때문이다.

입장을 기다리고 주문을 기다린 끝에 대망의(?) 아이스커피와 디저트용 빵 한 개를 받을 수 있었다. 
이곳도 결국 '한번은 와볼 만한' 곳이었다. 

카페 onion 입구 한쪽 벽에 아래 글이 붙어 있었다.
건물을 개조한 사람의 생각을 적은 차분한 글이었다.

처음 이 집이 지어진 날을 떠올려 본다.

그때에도 누군가가 안채의 대청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 보았을 것이다.
그 시선이 바닥에서 하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묻어나며 공간을 채웠을 테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발자국이 머무르고 
수많은 말들이 쌓이며 수많은 눈길들이 겹쳐졌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그 모든 이야기를 더듬어가며
지금의 쓰임에 맞게 공간을 매만졌다.

하얀 도화지 위에 이 공간을 올리고 과거의 시선을 오늘까지 연장한다.
그때에도 누군가가 대청마루에서 마당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가 대청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본다.
우리의 지금이 잠시 휴식이기를, 새로운 영감이 이곳에 있기를, 조용히 기도한다.

자리를 잡기까지는 지루했지만 아내와 마주 앉은 한가로운 시간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내가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다. 아마 혼자라면 카페는 나와 상관없는 곳일 것이다.

사랑은 사소한 것들이 쌓이는 것이라고 했다.
탁자 위에 내가 흘린 빵 부스러기를 치우는 손, 짓궂은 농담에 흘기는 눈, 다정한 음성, 둘만 아는 지난 이야기, 나른한 분위기 같은······ 그러다 문득문득 미안해지기도 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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