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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그해 6월의 짧은 기억

by 장돌뱅이. 2024. 6. 11.

80년대 싱가포르에서 온 회사 손님이 있었다.
그는 제품 검사차 일 년에 서너 차례 한국에  오고 한 번 오면 한 달 정도씩 머무르곤 했다.
그때마다 내가 담당이 되어 '시다바리'를 하다 보니 일을 떠나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자상한 가장이었다. 자주 지갑 속 어린 딸아이의 사진을 꺼내보며 그리워했다. 일을 마치면 술자리를 탐하는 다른 검사관들과 달리 시장이나 백화점을 돌며 딸에게 줄 갖가지 인형들을 사모으러 다녔다. 함께 사진을 볼 때 '이쁘긴 하지만 내 딸이 훨씬 이쁘다'고 내가 말하면  'How come?'을 반복하며 '발끈'을 과장하기도 했다. 

세상에 망고라는 과일이 있고, 우리 가족에게 그걸 처음 먹게 해 준 사람도 그였다. 
어느 날 그가 백화점에서 바나나의 가격을 물었다. 
"1500원."
내가 가격을 알려주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For one piece? or a bunch?"
나는 '당연히 한 개 값이지'라고 했다.
바나나는 낱개 포장되어 있지 다발로는 팔지도 않을 때였다. 그는 그 가격이라면 싱가포르에서는 한 다발을 살 수 있다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달러의 환율이 800원대였으니 2불에 가까운 가격이었다.
당시에 외국은커녕 비행기도 타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 비싼 바나나가 싱가포르에서는 그토록 싸구려(?) 과일이라는데 그의 표현대로 'unbelievable'하고 'incredible' 했다.

"그럼 망고는 얼마냐?"
바나나 충격이 가신 뒤에 그가 물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였다. 
"망고? 망고가 뭔데?"
나의 물음에 그는 망고를 정말 모르냐고, 어떻게 그렇게 맛있는 과일을 모를 수가 있냐고, 길길이 뛰다시피 했다. 그리고 열대과일에 대한 소개와 찬사를 시작했다. 바나나와 파인애플 외에는 아는 바 없는 나로서는 그가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해도 도대체 감이 오지 않는 '명왕성' 언어로 들릴 뿐이었다.
마침내 그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선언을 했다.
"내가 다음에 올 때  망고는 꼭 가지고 올게."

실제로 몇 달 뒤 그는 망고를 가져왔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생 망고 서너 개를 가방 속에 꼭꼭 숨겨와 내게 의기양양하게 내밀었다. 속에 딱딱한 씨는 먹을 수 없다는 것까지 알려주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그가 선물한 '천상의 맛'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내던 87년 6월 어느 날 저녁. 
그가 좋아하는 삼계탕을 먹으러 가기 위해 호텔 문을 나섰다.
호텔 뒤쪽 골목에 있는 식당을 향해 걷는데 큰길 사거리에 소대병력의 전투경찰들이 중무장을 한 채 서있었다. 마치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외계인 군단 같은 모습이었다.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긴장된 모습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무 일 없어. 그냥 걸어 가면 돼."
삼계탕 집을 가려면 전투경찰 앞을 지나야 했다.
"아무 일도 없는데 군인들이 저렇게 나왔냐? 혹시 북한 게릴라라도?"
나는 실소를 했다.
"군인이 아니고 경찰이야."
나의 말에 그는 움직이지 않은 채 경찰들을 주시했다.
그리고 당시에 뉴스마다 쏟아져 나오던 데모 소식이 생각났는지 물었다.
"여기서 데모가 있나?"
"Maybe··· maybe not(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

그 무렵에 데모는 거의 일상이었다. 알고 지내는 선후배 몇몇은 매일 새벽이면 '피세일('유인물 살포한다'는 뜻의 은어)'을 나가고 낮에는 코밑에 치약을 바른 채(최루가스 순화책) '전투'에 참가한다고 했다.
"코리아의 민주주의를 위해 너도 같이 소리를 질러보는 건 어떨까?"
나의 농담에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삼계탕을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가자고 했다.
'화염병이나 최루탄이 난무하는 폭력 속에 갇히는 불운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와 호텔에서 식사를 마치고  헤어져 나오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바탕 푸닥거리가 지나갔는지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공기 속에 숨어 있었다.
아까 전투경찰이 서있던 사거리 어름에 다다르자 갑자기 이십여 명의 젊은이들이 나타났다.
요즘 말로 하면 플래시몹을 하듯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비에 흠뻑 젖은 채 도로에서 허공으로 주먹을 내지르며 구호를 외쳤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거리의 시민들도 제자리에서 목소리를 보탰다. 나도 그랬다.
뒤이어 경찰들이 나타났고 젊은이들은 근처 골목으로 시장으로 순식간에 흩어졌다.
'정규전' 뒤의 '게릴라전'인 듯했다.

같은 나이의 싱가포르인과 한국인.
세상살이의 경험도 비슷할 터인데  나는 어쩌다 그 기괴한 모습의 경찰을 '평범하게(?)' 보고, 그는 경악스러운 공포로 보았을까? 우리는 왜 이렇게 왜곡된 감정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고 있는 것일까? 그가 분신이라는 극한 방법까지 동원해야 했던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동일한 크기의 절망을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이라 해도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차 안에선 부정한 권력에 대한 분노와 함께 비애감이 아프게 피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해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의 도시에서는 24만 명의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한 시위에 나섰다. 시위는 시가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격렬했고 경찰은 전국에서 3천8백 명을 연행했다. 오후 6시 성공회 정동 성당에서는 애국가가 울려 퍼졌고 분단과 독재의 세월을 의미하는 42번의 종이 울렸다. 역사적인 6월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6월 10일 이후 17일 동안 전국에서 벌어진 시위는 2145회였다. 발사된 최루탄은 35만 발에 이르렀다.
1987년 한 해 동안 약  67만 발의 최루탄이 사용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그중 반이 사용된 것이니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던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80년대 최루탄을 독점 생산하던 회사의 대표가 국내 최고의 납세가가 되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탄아 탄아 최루탄아 八軍으로 돌아가라
우리 눈에 눈물나면 朴家粉이 지워진다
꾸라꾸라 사꾸라야 大學街에 피지 마라
네가 피어 붉어지면 三味線이 들려온다

시인 김지하가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운동 때 지은 <최루탄> 노래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곡조에 붙여 부르면 된다.
'朴家粉'은 일제강점기의 화장품 이름이나 당시 권력자 박정희의 이름과 묘하게 겹친다.
'三味線(사미센)'은 일본 악기다.

최루탄(催淚彈)은 말 그대로 '눈물을 재촉하는 폭탄'이다.
김대중 정부 이후 인권 차원에서 최루탄 사용은 금지되었다. 근래에 들어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정권의 행보를 보며 우리에게 눈물을 강요하고 재촉하던 세월이 정말 다 지나간 것인가 다시 물어보게 된다.

*추가 : 
그 싱가포르 친구가 내게 깨닫게 해 준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자동차의 경적 소음이다.
“왜 한국사람들은 경적을 이렇게 많이 사용하는 거지?”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그가 갑자기 물었다. 
"무슨 경적?"
내가 묻자 그가 "이 소리가 안 들리냐?"고 말하며 팔을 벌렸다. 눈을 감고 들어보라고 했다.
그때까지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다녔던 거리는그가 깨우쳐주자 온통 자동차 경적 소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내가 이제껏 이런 소음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었다니!
(교통문화가 정착되기 전 80년대 운전자들은 경적을 자주 눌렀다.
요즈음 베트남 대도시의 거리를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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