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

소설 『맡겨진 소녀』

by 장돌뱅이. 2024. 6. 18.

『맡겨진 소녀』는 중편 소설 한 편이 담긴 103쪽의 얇은 책이다.
아일랜드 농촌 마을의 한 소녀는 먼 친척인 킨셀라 부부에게 잠시 맡겨진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정인 데다가 엄마가 동생의 출산을 앞둔 몸으로 집안일까지 해야 해서 네 명의 아이들을 모두 보살필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은 소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겪는 일상을  이야기 한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는 어른들이 저지르는 허세와 거짓,  무책임과 무관심, 나아가 미필적 고의의 언어적 폭력이 산재해 있지만 소설은  그런 불합리에 격렬하게 맞서지 않는다.

대신 수채화 같이 맑은 상징적 언어들로 상황을 차분하게 다스려 오히려 읽는 사람들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자식을 앞세운 참척(慘慽)이란 극한의 슬픈 사연마저도 조용한 소문처럼 지나간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가능한 절제하여 연기할수록 객석의 관객에게 전달되는 슬픔의 강도는 더 커지는 법이다.

카드 게임으로 집의 재산인 암소를 날린  소녀의 아빠는 소녀의 관심사에 시종일관 무관심하다.
가지를 땅에 늘어뜨린 나무가 아픈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소녀에게 아빠는 '수양버들이잖아' 하고 무뚝뚝하게 설명한다. 아빠는 친척 아저씨와 '소의 가격, 유럽경제공동체, 남아도는 버터, 소독액과 석회 가격'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지만 남자들의 그런 이야기는 사실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소녀는 생각한다. 나 역시 한 때 아무 이야기 아닌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던 것 같다.

모아두지도 않은 건초더미를 마치 모아둔 것처럼, 진짜 그러면 좋겠다 싶은 거짓말을 자주 하는 아빠는 소녀를 데려다 주는 '일'을 마친 후 바쁠 리 없는 '일'을 바쁘다고 지어내며 서둘러 떠난다.
소녀의 짐을 건네주지 않고 작별 인사 대신에 말썽 피우지 말라는 피상적인 당부만 남긴다.

다행스럽게도 소녀는 친척들과 함께 지내면서 이때까지 가족에게선 느껴보지 못한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다. 부부는 '부끄러움이 없어 비밀도 없는' 진심으로 소녀와 교감한다.
아빠는 한 번도 자신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지만 아저씨는 소녀의 손을 잡아주고 걸음 폭을 맞추려 자신의 보폭을 줄인다.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 개가 됐구나."
내가 저 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 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 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
"보이니?" 아저씨가 말한다.
"네." 내가 말한다. "저기 보여요."
바로 그때 아저씨가 두 팔로 나를 감싸더니 내가 아저씨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

소녀는 비로소 가족의 참다운 의미를 알게 되지만 두 곳에서 느끼는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둔다'.
다만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 깨달음을 강렬하게 압축하여 표현한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처음 '아빠'와 나중 '아빠'의 구분이 서늘하게 다가온다.
나는 어떤 자식이었고 어떤 남편이었으며 어떤 아빠였을까?

『맡겨진 소녀』를 읽으며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떠올렸다. 오래전 영화라 자세한 건 기억에 없지만 친구의  중요한 공책을 실수로 집에 가져온 어린 소년이 그걸 돌려주기 위해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의 영화였다. 그 과정에 무심코 혹은 의도적으로 던지는 학교와 집과 동네 어른들의 무수한 말들은 어린 소년의 순수한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폭력이었다. '맡겨진 소녀'에게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의
『맡겨진 소녀』는 영상독서토론 모임 "동네북"의 이번 달 책이다.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래 눈부신  (0) 2024.06.21
NBA Finals & EURO 2024  (0) 2024.06.19
먹고 싶은 걸 먹는다는 것  (0) 2024.06.16
솟쩍다 솟쩍다  (0) 2024.06.14
내겐 매우 어려운 우리말 3  (0) 2024.06.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