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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오래 눈부신

by 장돌뱅이. 2024. 6. 21.

할아버지로서 나는 손자들과 객관적이고 공명정대한 논리로 만나고  싶지 않다.
손자저하들의 언행에 매몰될 뿐인 나는 늘 '편파 100%'다. 
아래 글이나 사진에서 혹 오골거림을 느끼는 사람은 손자가 없는 사람일 거라고 확신한다.

하교길 기다림 끝에 드디어 멀리서 손자저하가 나타난다.
걸어나오던 손자저하는 어느 순간 뒤로 돌아서서 걷기 시작한다.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표시다.
아마 앞쪽 얼굴은 웃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뒷모습도 나는 좋다.

체스와 장기를 둘 때 우리 둘 사이에는 암묵적 원칙이 있다.
나는 일수불퇴, 손자저하는 10수 '가퇴(可退)'이다.
매번 승리하는 손자저하의 의기양양은 그 보상이다. 

골을 넣어 좋은 날

저하의 장래 희망은 축구선수다.
(코치에게 칭찬을 받은 날이다.)
어떤 날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축구선수 대신에 과학자가 될까? 요리사가 될까? 고민 중이에요."
(아마 코치에게 질책을 받은 날일 것이다.)

저하의 꿈은 어디로 수렴할까? 
나는 올리비아 뉴튼 존의 <Let me be there>를 흥얼거릴 뿐이다.

Wherever you go, wherever you may wander in your life  
Surley You know I'll always wanna be there  
(당신이 어디를 가든지 생의 어딘가를 거닐든지
내가 항상 거기에 있고 싶다는 걸 당신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Holding your hand and standing by to catch you when you fall 
 Seeing you through in everything you do  
(당신이 넘어졌을 때 당신을 붙잡기 위해 당신 손을 잡고 거기 서 있을게요.  
당신이 하는 모든 걸 지켜보면서.)

2호저하는 밴드의 힘을 믿는다. 손등에 난 상처쯤이야 밴드 한장으로 간단히 치료한다.
저하는 할머니 이마에 난 상처에도 밴드를 붙여주고 다정하게 입으로 호~ 불어준다.
할머니는 '상처가 순식간에 치유가 되었다···
···, 는 놀라운 표정을 짓는다.

저하에게 책은 읽는 것이 아니다. 차가 지나가는 고속도로다.
고속도로 건설엔 트럭과 포크레인과 불도저가 필요하다는 것.
지금은 마지막 단계로 길을 평평하게 하기 위한 로드롤러가 작업 중이라는 것.
진지한 저하의 설명을 추임새를 넣어가며 듣는다. 역시 사람은 굶어도 배워야 한다.

성공하는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5분이내에 결정된다.
이불을 개느냐 아니냐로.

2호저하는 최근에 자전거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이제 점점 더 먼곳으로 떠날 것이다. 
1호도 저 나이에 인접한 모든 아파트를 '호핑(Hopping)' 하며 다녔다.
나는 저하의 속도에 맞춰 밀착 경호를 해야 한다.

1,2호 형제의 티격태격은 짧고 빈번하다.
눈맞춤과 어울림도 짧고 빈번하다.
언젠가 티격태격에 속이 상한 1호저하가 부모에게 말했다.
"동생을 하나 더 낳아 줘요.  그래야 2호도 형 노릇이 얼마나 힘든지 알거에요."

시냇물에 빠진 구름 하나 꺼내려다
한 아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송사리떼 보았지요
화르르 흡어지는 구름떼들 재잘대며
물장구치며 노는 어린 것들
샛강에서 놀러온 물총새 같았지요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 새끼들
풀빛인지 새소린지 무슨 초롱꽃인지
뭐라고 뭐라고 쟁쟁거렸지요

무엇이 세상에서
이렇게 오래 눈부실까요?

- 천양희, 「한 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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