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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미국

하와이5 - 우리가 지나칠 수 없는 이곳

by 장돌뱅이. 2012. 6. 5.

오하우 OHAU 섬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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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하이나에서 카훌루이 공항까지는 40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였으나
차량을 반납해야 하고 출근시간의 교통 정체라는 변수를 고려하여 숙소에서
출발을 서둘렀다. 그러나 카훌루이쪽으로 가는 도로는 예상보다 한산했다.
도리어 그 반대쪽 방향이 차량의 통행이 많았다.
아마 사람들이 거주는 마우이 최대 도시인 카훌루이에서 하고 직장은 해변을 따라
줄지어 있는 각종 리조트와 가게들에서 하는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시 외곽에서 중심지로 출근을 하는 통상적인 개념과는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위 사진 : 이틀전에 올랐던 할레아칼라산이 구름에 덮혀있다.

시간이 넉넉하여 바다에 접한 뷰포인트에 잠시 차를 세웠다.
밤 동안 비를 뿌렸던 구름은 멀리 바다 건너 할레아칼라 산 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오늘 아침 할레아칼라를 오른 사람은 짙은 구름 속을 통과했을 것 같다.
 

 

*위 사진 :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마우이

공항에서 커피와 빵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마우이, 내겐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힌두교를 뺀 인상의 섬이었다.
수수한 도로변 풍경에 검붉은 흙과 바위, 바다와 파도, 그리고 높다란 화산까지.
비행기가 하늘로 솟자 흰 구름이 밀려오며 그 마우이의 모습을 지우고 있었다.
 

*위 사진 : 오하우섬의 호놀룰루

오하우의 호놀룰루 HONOLULU 공항까지는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륙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도착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멀리 구름 사이로 호놀룰루가 보였다.


‘아바지’가 새겨진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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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놀룰루에 도착하여 렌트카로 제일 먼저 간 곳은 루크 애비뉴 ROOKE AVE. 2756번지에
있는 "한국독립문화원"이었다. 이곳은 1909년 2월 하와이 이민자들이 결성한 대한인국민회
(大韓人國民會)의 회관이 있던 장소이다. 결성 당시 회원은 4천 명으로  해외 한인
단체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위 사진 : 한국독립문화원 전시실에서 촬영(이하 자료 사진 모두 동일)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에서는 우리의 역사상 첫 공식 이민자 121명을 실은 배가
하와이를 향해서 출발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한
‘한미합작’의 이민이 성사된 것이었다. 1903년 1월 13일 새벽 3시 30분 그들은 지금의
알로하 타워 ALOHA TOWER 부근의 부두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1905년 8월까지 모두 7,200여 명이 입항하게 된다.

  그들은 배에 오를 때처럼 줄 세워져 배에서 내려졌다. 그들의 몰골은 하나같이 후줄근
   하고 추레해서 궁상스러워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랜 뱃길의 어질병에 시달려
   지칠 대로 지친데다가, 삼베입성들은 선실에서 줄곤 입고 뒹굴어서 땀이 차고 때가 절어
   있었고, 그동안 베개 삼았던 보퉁이를 하나씩 들고 짚신발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눈에 보이는 것마다 낯설고 눈설어 그들은 갑판에서 환호하던 때의 생기를 다 잊어
   버린 채 잔뜩 긴장하고 겁 질려 있었던 것이다.
   인원점검이 끝나고 그들은 다짜고짜 주사를 두 대씩 맞아야 했다. 그리고 종이에다가
   무작정 손도장들을 눌렀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으니 무슨 주사인지 알 수가 없었고,
   종이에 가득 적힌 꼬부랑글씨가 무슨 내용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저 하는 대로
   내맡기고 손짓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손도장을 무르고 사무실을 나온 그들은 갑자기 바뀐 상황 앞에서 눈치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갓댐, 스팅키 애니멀! 허리 업, 허리 업!(야 이 냄새 나는 짐승새끼야! 빨리 해, 빨리!)"
   가죽장화에 차양 둥근 모자를 삐딱하게 쓴 몸집 큰 백인들이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치고
   있었다. (중략) 트럭들은 시가지를 벗어나 키 큰 풀들이 무성한 벌판으로 접어들었다.
   그들의 눈에 무성한 풀밭으로 보이는 것은 사탕수수농장이었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1권 120쪽 -

그들은 오아후, 마우이, 빅아일랜드 등의 섬에 있는 사탕수수나 파인애플농장에서 하루
10시간씩 주6일을 노동하였고 월급은 15달러였다. “대한사람이 인간의 천국인 미국에
이민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은혜”라고 사람들을 회유했던 미국인
선교사의 말은 그야말로 감언이설이었던 것이다.

   돈은 모아지지 않았다. 밥만 겨우 먹여줄 뿐이어서 옷을 사입고 신발을 사신어야 했다.
   겨울이라고는 없이 줄기차게 뙤약볕 속에서 땀을 흐리게 되니까 옷은 너무나 빨리 삭고
   낡아졌다. 신발 또한 거친 원시림의 개간작업에 시달려 금방금방 찢어지고 망가졌다.
   그런데 옷값이며 신발값은 턱없이 비쌌다. 루나(감독이라는 뜻의 하와이 말)들이 운영
   하는 매점의 물건 값은 어느 것이나 비싸지 않은 것이 없었다. 루나들이 제멋대로
   올려붙인 가격이었다. 그러나 시내 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들로서는 그 비싼
   물건들을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한 달에 15달러씩을 모아 빚 100달러를
   갚고 농장을 벗어난다는 것은 까마득한 일이 되어갔다.
   사람들의 마음은 내려앉기 시작했다.                 - 위 소설 1권 325쪽 -


낯설고 힘든 환경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조국을 잊지 않았다.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삯도 아까워 보내기를 주저하고 옷과 신발을 꿰매어 입고 신으면서도 수입의 일정
부분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아낌없이 내놓아 대한인국민회는 이를 여러 차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낼 수 있었다. 
 

 

 

 

1908년 미국인 스티븐슨을 격살한 장인환, 전명운의사의 재판비용을 위한 대대적인
모금운동 때는 자그마치 7천 달러가 넘는 돈이 모아졌다고 한다. 월수입 15달러의
노동자들임을 생각할 때 놀라운 액수였고 눈물겨운 정성이었다.
스티븐슨은 일본의 강압적인 고문정치에 따라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직을 차지하고 있던
자로  ‘조선은 일본의 보호통치 아래서 나날이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있으며, 조선사람들은
일본의 통치를 환영하고 있다’거나  ‘한국에 이완용과 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의 큰 행복이요, 동양의 다행이다’ 는 식의 망언을 일삼던 자이다.  

 

 

그들은 또 농장노동의 고단함도 잊은 채 무보수의 자발적인 군사훈련에 참여했다.
그들에게 “총을 맨 군인이 되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왜놈들을 무찔러대며 고향으로
간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꿈만 같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조정래의 글)
병영 막사와 연병장도 그들 손으로 직접 세우고 만들었다. 
 

 

 

 

한국독립문화원에는 당시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한제국이 발행한 집조(여권)과 다양한 독립의연금 증서들.
“혈성금!” 그랬다. 찌는 듯한 무더위를 이겨내며 노동으로 건져 올린 그 돈이
왜 ‘피’가 아니겠는가. 그 앞에서 한참을 서있던 아내는 콧날이 시큰해져온다고 했다.
 

 

독립문화원 뜰에 2003년에 세워진 “무명애국지사추모비”가 있었다.
아내와 나는 잠시 엄숙한 마음이 되어 그 탑신에 새겨진 글을 읽어보았다.

   망국의 한을 품고 하와이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수입의 십일조 등을 바치며
   온 충성을 다하다가 눈을 감으신 무명의 애국지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여기 추모비를 세운다.  
 

*위 사진 : 무명애국지사추모비

사실 추모비는 초라해보였다. 아내와 내가 기억하는 한 태극문양이 가장 조악하고 촌스럽게
사용된 예인 것 같았다. 그 곁에 있는 플라스틱 인조무궁화 꽃으로 치장한 독립문 모형도 그랬다.
초등학생 학예회 준비물처럼 조잡해 보이는...
 

*위 사진 : 독립문 모형

그러나 누가 그 모습을 꼬집을 수 있으랴.
그것은 우리 사회가 그 시절과 그들을 잊고 지내왔다는 증거일 뿐이다.
이곳 토지의 매입도 독립문화원도 정부나 나서 조성한 것이 아니라
2001년 국내의 한 학원재단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확실한 자기매김을 했던 그들이 사라진 그 어떤 역사도
제대로 된 역사일 수 없다.
 

*위 사진 : 한국독립문화원을 떠나기 전 그곳 주재하는 직원이 사진을 찍어주었다.

한국독립문화원에서 멀지 않은 누우아누 애비뉴 NUUANU AVE.의
공동묘지에는 당시에 이민을 왔던 수많은 한인들이 묻혀있다.
 

 

1874년에 태어나 1967년에 돌아가신 박**씨.
1880년에 태어나 1944년에 돌아가신 최**씨.
1865년에 태어나 1937년에 돌아가신 김**씨.
...
...
 

 

 

 

생과 사의 년도만 기록된 짧은 비문이지만 그 속엔 그들이 겪었을 격랑의 세월이
스며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고향을 떠나 먼 이곳에 누워있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것을 상징 하는 듯 했다. 한 비석에 새겨진 ‘아바지’는 글자가 아니라 지금도
애절하게 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인양 아내와 나의 발길을 오래도록 잡았다.


이 나라가 뉘 나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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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하 스트리트 LILIHA ST. 1832번지에는 이승만이 세운 한인기독교회가 있다.
1917년에 세워져 193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한옥양식으로
기와지붕을 한 거대한 교회건물 옆에는 이승만의 동상과 우남관이라는 이승만의 호를
딴 기념관이(?) 있었다. 문이 잠겨 있어 기념관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위 사진 : 한인기독교회

 

 

이승만에 대해선 사람들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다.
그에 대한 아내와 나의 생각은 요약하면 대충 이렇다.

이승만은 몇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고 1904년 미국에 건너가 하바드대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적어도 그는 1918년까지 반일
독립운동과 무관했다.”(이세영의 글, 한겨레신문 1995년)

일례로 1908년 장인환, 전명운의사의 ‘스티븐슨 격살 사건’때 법정 통역을 요청받은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의 비싼 호텔에 한 달 남짓 투숙한 후 “재판이 언제 열릴 지도
모르고 논문도 써야 하니 시간관계로 떠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예수교인이니까
살인관계 재판 통역은 원하지 않는다" 며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그는 1919년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은 당장 독립될 가망이 없고 또 독립된다고
하더라도 자치능력이 없으니 미국이 주관하여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한국을 당분간
통치하게 해달라”는 요지의 이른바 위임통치청원을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제출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첫 국무총리에 선출되자 단재 신채호는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며
"미국에 들어앉아 외국의 위임통치나 청원하는 이승만을 어떻게 수반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이오. 따지고 보면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오. 이완용 등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우리나라를 찾기도 전에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란
말이오" 하고 격렬히 성토한 바도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된 이후에도 이승만이 상하이에 머문 것은 겨우
6개월뿐이었다. 미국과는 다른 중국의 생활이 그에게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임정의 거듭된 요청에도 이승만은 상해로 복귀하지 않았다.
1925년 3월 상해임시정부는 결국 이승만을 불신임하고 탄핵안을 가결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임정에게 보내던 재미동포의 자금지원을 단절하는 것으로 맞섰다.

이처럼 이승만은 미주와 상하이 등에서 가는 곳마다 특유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행동으로
독립운동 세력 간에 갈등을 조장하고 분열을 일으켰다. 김원용의 글에 따르면 “그는 어느
모임에서든 자기를 장으로 추대하지 않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때문에 “그 싸움
들의 원인이 민족운동이나 단체 발전에 관한 정견차이가 아니었고 이승만이 단체를 억압
하며 재정과 권력을 독점하려는 욕심으로 일으킨 싸움” 들이었다.

이승만에게 “독립운동이란 곧 미국의 동정과 지지를 얻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언제나 무관심과 냉대를 받을 뿐이었다.” 미국의 정보(문서)는
그를 독립운동가가 아닌 ‘목사’로 불렀다고 한다. 그가 임시정부의 수반이 된 데는
미국의 명문대의 박사 출신이라는 경력과 당신 미국 대통령인 윌슨이 프린스턴대학
총장 시절에 자신이 그와 가까운 사이의 제자임을 과시하던 것이 일정 부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19년에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려고
1919년 1월 6일 호놀룰루를 출발한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도 끝내 여권조차 받지 못해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승만은 역사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도자라기보다는 대통령에 대한 끊임없는
   집념을 갖고 있는 ‘정략가’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본심과 노선을 정확히 파악한, 미국의 ‘한국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이세영의 글, 한겨레신문 1995 -


이승만은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하와이 국민회의 박용만을 야만적이라
비난했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거사도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난하며 다시는 반복하지
말라고 김구에게 편지까지 보냈다. (그런 그가 단독정부 수립 후 북침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듯한 호전적인 태도를 보인 사실은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하와이 국민회의 정책과 주도권을 두고 갈등을 빚던 이승만은 결국 1921년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국민회에서도 탈퇴하여 “동지회”를 조직했다.
그에 맞섰던 박용만의 글은 되새겨 읽어볼만 하다.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이 조선백성들이 무식해서인가 아니면 나라의 무력이
   약해서인가. 그건 재론의 여지도 없이 나라의 무력이 허약했기 때문이다. 나라의 힘이
   왜 약해졌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벼슬아치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층층이 부패하고
   타락하면서 국고를 탕진하고 가렴주구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동의 엄연한 사실을
   두고 망국의 책임을 어찌하여 백성의 무식함으로 돌리려 하는가. 또한 나라를 되찾는 데
   있어서 백성이 무식해서 안된다는 말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저 치욕의 을사보호조약
   직후부터 전 국토에서 불길처럼 일어난 의병들을 보라. 그들 중에 유식한 양반들이 더
   많았던가, 무식한 백성들이 더 많았던가. 무식한 백성들이 열배가 더 많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며, 끝까지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도 무식한 백성이었음을 하늘이 다
   아는 바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무식함을 탓할 것인가. 그리고 또
   직시할 바가 있다. 무력을 휘두르는 자들은 무력이 아니고서는 물리칠 수가 없다는
   천고의 진리를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왜놈의 무력 앞에 무력으로 맞서지 않고는
   나라를 되찾을 그 어떠한 방도도 없다. (중략) 물론 교육은 중대하다. 그러나 교육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최선의 방책일 수는 없다. 무력을 양성하면서 동시에 교육을 실시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완수하겠다함인데,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허황된 망상인가. 우리와 일본은 원수지간이지만 미국과 일본은 원수지간이
   아니며, 우리에게 독립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지만 미국에게 조선의 독립은 강 건너 불일
   뿐인 것이다. 미국은 일본과 사이가 나빠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에게 약간은 협조를
   할지 모르지만, 전적으로 미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하겠다 함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몽상일 뿐이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5권 187 -188 쪽-

이승만 동상 하단에는 “대한민국건국대통령, 한인기독교회 창설하신 어른”이라는 글귀와
함께 "THE FATHER OF THE REPUBLIC OF KOREA" 라는 영문 표기도 있었다. 
 

 

아내와 내게 이승만에게 붙여지는 ‘건국대통령’의 호칭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무엇보다 먼저 나라를 찾은 것은 하와이 초기 노동이민자들에게서 보듯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향한 지난한 노정 위에서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무수한 민중들의 염원과 피땀이었지,
어느 한두 사람의 명망가가 이루어낸 ‘깜짝쑈’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군다나 그것이 독선과 아집으로 숱한 문제를 일으킨 이승만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아울러 ‘THE FATHER’라는 영어 표현도 그것이 ‘아버지’이외에 다른 뜻이 없는 것이라면,
그래서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말하는 ‘국부’를 뜻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거두고 싶다.
내가 아는 한 그가 ‘FATHER’라는 호칭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양아들로 받아들인
(4.19 당시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뿐이다.

 

*위 사진 : 4.19혁명 직후에 철거되는 이승만 동상
              
“엄정하게 말해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였다고 할 수 없다. 백번 양보해서 그가 독립운동가
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순수하지 않았다.”(김갑수의 글). 때문에 그는 다만 분단된 조국,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일뿐이다. 그리고 말년엔 학생과 시민들이 고귀한 생명을
바쳐가며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했던, 우리 근현대사의 모순이 집약된 추악한 모습의
독재자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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