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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경기도 광릉부근

by 장돌뱅이. 2012. 6. 14.

몇 해 전 아내와 서울의 궁궐과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여러 능(陵)을
집중적으로 돌아본 적이 있다. 옛 서울에 대한 공부를 해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찍어두었던 사진들이 보관함에 몇 년 째 남아 있다.
볼 때 마다 은근히 짐이 된다. 역시 공부는 내 체질이 아니다.
사진을 추려 짤막한 단상과 함께 정리 해보고자 한다.

 

 

광릉은 서울에서 40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다.
세조와 왕비인 정희왕후의 능이 있는 곳이다.
인근의 광릉수목원과 함께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구태여 다른 설명이 많이 필요 없는 곳이다.

세조는 화려한 능을 조성하여 국고를 낭비하는 폐단을 의식하여
자신의 능은 석실과 병풍석을 쓰지말라는 유연을 남겼다고 한다.
그래서 광릉은 다른 왕의 능에 비해 조촐하고 소박하다.
게다가 아내와 내가 광릉을 갔을 때가 숲의 나뭇잎까지 모두 떨어진 겨울이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사진 출처 : 문화재청(광릉) 홈페이지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同原異岡)릉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다. 좌측 능선의 봉분이 세조의 능이며
   오른쪽의 봉분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문화재청 (광릉) 홈페이지에서 인용-

 

 

 

*위 사진 : 세조의 능

 

 

*위 사진 : 낙옆이 수북한 짧은 숲길을 건너면 정희왕후의 능이 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그런 유택의 모습을 닮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조는 조카인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았다.
그리고 어린 단종을 귀양 보낸 것도 모자라 끝내 사약을 내렸다.
계유정란으로 김종서를 비롯한 숱한 대신들을 참살하였음은 물론,
자신의 아버지 세종이 아꼈던 후궁, 세조에게는 어머니나 마찬가지인, 혜빈 양씨와
4명의 이복동생, 그리고 10여 명의 조카들을 또 죽였다.
자신의 친동생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에게까지 죽음을 내렸다.
모두 역모의 혐의였다.

그의, 혹은 권력의 비정함이 섬뜩하다.
이른바 왕권(권력)이라는 의미가 그때와 지금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혈육의 정만은 다르지 않을 터인데......

 

 

서울에서 가다보면 광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봉선사가 있다.
봉선사는 한글 현판과 기둥에 붙은 주련들이 한글로 되어 있어 특이하고 편안한 절이다.
독립운동을 했던 운허스님이란 분의 불교대중화의 의지가 만들어낸 모습이라고 한다.

 

아직 걸려있는지 모르지만 황우석지지자들의 현수막이 있었다.
그가 국민들에게 사죄를 했던가? 기억에 없다.
수염을 기르고 눈을 감은 채로 병원에 실려들어가던 가증스런 연기와
자신들의 제자들을 들러리 세우고 오만한 자세로 기지회견을 하던 모습만 기억에 있다.
최근 일선에 복귀한 어느 재벌 총수의 뉘우침 없는 행보가 그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잘못을 저지른 것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인간은 아름답습니다.
   잘못한 것 없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하는 인간은 진부합니다.
   잘못을 해놓고도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인간은 위험합니다.
                                                  - 한완상의 글 중에서 -

 

봉선사 부도밭 옆에 춘원이광수의 추모비가 있다.
한때 우리나라 근대문학을 이끌었던 소설가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민족운동가로,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나가라고 선동했던 친일파로 전락한 끝에
한국전쟁 당시 북으로 끌려간 비운의 지식인 이광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작년에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2쪽에 걸쳐 그의 이력이 소개되어 있다.
어떤 의미로건 우리 근세사에서 그의 비중이(혹은 그의 친일행각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일제강점기의 창씨개명한 이광수의 이름은 향산광랑(香山光郞)이다.
“친일문학론”을 지은 문학가 임종국씨는 처음에 이 이름을 들었을 때
이광수의 고향에 있는 묘향산의 ‘향산’을 가져다 붙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얕은(?) 것인지 이내 깨달았다고 했다.

매일신보 40년 1월5일자의
'지도적(指導的)제씨(諸氏)의 선(選)씨(氏)고심담(苦心談)'에서
'지도적 위치의' 이광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2천6백년 신무(神武)천황께옵서 어즉위를 하신 곳이 강원(橿原)인데
   이곳에 있는 산이 향구(香久)산입니다. 뜻 깊은 이 산 이름을 씨로 삼어 ‘향산’이라고
   한 것인데 그 밑에다 광수의 ‘광’자를 붙이고 ‘수’자는 내지(內地)식의 ‘랑’으로 고치어
   ‘향산광랑’으로 한 것입니다.”

신무천황(神武天皇), 일본식으로 ‘진무 덴노’는 일본의 초대 천황으로 전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였기에
“신체의 어느 부분을 바늘로 찔러도 일본의 피가 흐르는
일본인이 되지 아니하여서는 안된다”고(매일신보 40.7.6) 역설하고,

“황은지극(皇恩至極)하옵시니.../우리의 모든 물건을 바치자/
우리의 모든 땀을 바치자/ 우리의 모든 피를 바치자 /
우리 충성에 불타는 머릿속을, 심장을 바치자” 라며 (매일신보 40.7.6)
일제의 침략전쟁에 나설 것을 강요, 선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오늘 우리 사회가 지닌 모든 문제의 뿌리가 일제강점기에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시기에 일제에 의해 부정당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우리 스스로가 올바르게
되돌려놓지 못한 해방 이후의 역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불우하게 일생을 마친 개인 이광수에게는 한 가닥 연민의 정을 보내지만
그가 걸어간 흔적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망령처럼 떠돌고 있고
우리에게 가혹한 고통을 강요하고 있어 용서할 수 없다.
그와 편하게 만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친일파라는 역사적 숙제를 올바르게 청산해야 한다.
그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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