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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터어키

우연한 터어키 여행 6.- 쿠르드 족에 대하여

by 장돌뱅이. 2005. 3. 2.


*뉴호텔의 종업원들

호텔 종업원은 모두 남자였다.
우락부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더없이 순박하고 착한 심성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쿠르드족이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인구 5만의 실로피 주민의 대부분이 쿠르드 족이었다.
소미는 경찰과 군인만 외부에서 온 터어키족이라고 했다.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고유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는 터어키어를
쓰지만 집에서는 쿠드르의 언어를 쓴다고 한다.

나중에 알아본 쿠르드족은 슬픈 역사를 지닌 민족이었다.
쿠르드족은 인구2천5백만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소수 민족으로 이라크북부, 터어키 동부, 이란북부 등에 흩어져 산다.
약 7천만명인 터어키 인구의 20%가 쿠르드 족이다.
터어키 정부는 쿠르드족의 독립을 우려하여 소수민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동화정책을
강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라크 영토 내의 쿠르드인 무장단체를 공격하기도 하고
일부 친터어키 쿠르드 부족을 포섭하여 종족간 내전까지 유도해왔다고 한다.

이란이나 미국 등 다른 주변 국가나 강대국들도  쿠르드 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자신들의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해왔을 뿐이다.
80년대 이란은 이라크와 전쟁이 발발하자 이라크내 쿠르드족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다.
이라크 내부세력 약화를 목적으로, 또 후세인 정권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 이에 대한 보복으로 후세인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 쿠르드족에 대한
무자비한 토벌을 가했다. 화학무기까지 동원하여 무려 5천여명의 민간인까지 살상을 했지만
당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서방국가들은 이란과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라크
의 이같은 만행을 묵인해 주었다.

미국은 1차 걸프전 때 쿠르드족의 독립을 보장하며 반후세인 운동을 사주했다.
그러나 종전 후 후세인 정부군의 반격을 받아 궁지에 몰린 쿠르드족의 지원요청은
냉담하게 묵살해 버렸다.
이로 인해 무수한 쿠르드인이 죽고 2백50만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중동에서 쿠르드족이 독립이나 자치구라는
자신들의 꿈을 이룰 가능성은 앞으로도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런 복잡한 문제와 상관없이 실로피에서 만난 쿠르드족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너무도 순박하고 친절한 심성의 사람들이었다.  
거리를 걷다보면 사람들은 낯선 우리를 불러 자주 차와 담배를 권했고 말이 통하지 않음에도 자리를 내주었다.
과일가게의 아저씨는 매번 돈을 받지 않으려고 사양을 하는 통에
과일을 사고 나면 돈을 지불하는 일로 늘 소란을 떨어야 했다.

우리 일행 중 J는 영어를 거의 못했다. 그러나 그는 실로피에 머무는 4일 동안 특유의 친화력으로
호텔 종업원과 호텔 인근의 마을 사람들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가장 큰 인기를 누렸다. 
그가 설혹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별반 소용이 없었을 것이었다. 마을사람들 역시 영어완 상관 없었기 때문이다. 
“월드컵”이란 말도 터어키어로 “두니아 쿠파시”라고 해야 의미가 통했다.

J와 사람들이 만나는 자리에 동석을 한 적이 있다. J의 말은 반 이상이 한국말이었고 나머지 반은 그림이었다.
상대방은 터어키어로 대꾸를 했다. 사이사이 어색함을 서로
웃음으로 매꾸면서 그들은 매우 즐거워했다.
의사소통이라기보다는 정서적인 교감이었지만 그것 이상을 나누기 위한 공통의 언어가 구태여 필요해 보이지도 않았다.
만약에 그들 사이에 공통의 언어가 있었다면
그들의 만남은 더 사무적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실로피를 떠나는 날, J는 그곳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크고 작은 선물을 받았다.
다시 만날 가능성이 없는 짧은 만남이었을지언정, 함께 나눈 시간만큼은 어떤 이기심도 없는
순수한 것이었음을 기억하고 싶은 쿠르드인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소, 이들은 매일 아침 어디선가 나타나 동일한 장소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녔다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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