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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미술관 안과 밖에서

by 장돌뱅이. 2024. 7. 2.

인사센트럴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아메리칸 팝아트거장展(THE MASTERS OF AMERICAN POP ART)"에 친구들과 다녀왔다.
나는 그림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전시회엔 그림을 감상한다기보다 그냥 보러 간다. 어떤 이해나 평가 없이 우리집 거실에 걸어두면 좋겠다 싶은 그림 앞에 가급적 오래 서있을 뿐이다. 그림을 두고 번지는 상상과 사색의 조용한 시간을 좋아하는 '전시회 소비자' 수준이라는 게 적절하겠다.
전시장 들머리에는 팝아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
    

<팝아트와 판화, 포스터  Pop Art, Printmaking, and Posters > 

소비 사회의 대량 생산과 대중화에 대해 연구하던 팝아트 작가들은 석판화와 실크스크린 같은 판화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당대의 물건 생산 방식과 동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판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경제적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판화는 선명하고 깨끗한 색채와  선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팝아트 예술가들에게 매력적이기도 했다.

강렬하고 그래픽적인 이미지를  통해 팝아트의 미학을 구현하고자 했던 작가들에게 있어 판화는 매우 적절한 매체였다.
또한 판화는 포스터를 만들기에 최적화된 방식이었다.
본래 포스터는 공공장소나 상업 시설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특히 팝아트 작가들이 활동을  시작하고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요소들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포스터의 그래픽 디자인적 부분들이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팝아트 작가들은 자신의 예술뿐만 아니라 가치관과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포스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이처럼 팝아트와 판화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의 발전과 확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판화, 포스터, 미국 경제적 풍요의 반영 등이 팝아트를 이해하는 키워드인 듯했다.
어느 분야가 그렇듯 미술분야도 새로운 실험이나 사조는 기존의 것들로부터 배척과 냉대를 받는다. 
마네, 모네, 세잔, 드가 등 '인상파 화가'들이 19세기 후반 새로운 인식과 기법의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어 현대 미술의 시작을 알렸을 때 기존의 화단에서 받은 것은 비웃음과 무시였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인상주의'라는 이름 자체가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어떤 비평가가 이 제목(모네의 그림, <인상(印象), 해돋이>)을 특히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미술가들을 한데 묶어 조롱조로 '인상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러한 화가들이 건전한 지식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며, 한 순간의 인상을 그림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런 명칭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품고 있는 경멸적인 어조는 '고딕'이나 '바로크' 또는 '매너리즘' 같은 용어들의 비방적인 의미가 지금은 잊혀졌듯이 곧 잊혀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화가들 자신이 인상주의자라는 이름을 받아들였고, 그 후 이러한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중에서 -

팝아트에 대한 평가절하도 있었던 모양이다.
20세기 중반 미국 현대 예술의 영향력 있는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팝아트가 아무리 흥미롭다 해도 나는 그것이 그렇게 신선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피상적 수준 이상으로 취향에 도전하는 것도 아니다. 아직까지 그것은 (아마도 제스퍼존스를 제외하면) 취향의 역사에서 새로운 에피소드일지는 모르나, 현대 예술의 진화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에피소드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복잡한 개념과 설명을 내가 온전히 이해하진 못한다.
나는 그저 바라볼 뿐이므로 우리집 거실에 붙여놓고 싶은 느낌의 그림이라면 다 좋다.
전시 작가들 중 이름이 귀에 익은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앤디 워홀의 작품 몇 장을 첨부해 본다.

로이리히텐슈타인의 <절망>, 1968
로이 리히텐슈타인, <I LOVE LIBERTY>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이름이 귀에 익은 건 2007년엔가 삼성 그룹 미술품 목록이 비자금 의혹과 함께 보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세간의 관심은 2002년 미국 크리스티에서 낙찰받은 그의 그림 <행복한 눈물>의 가격에 있었다.
당시 환율 기준으로 무려 약 87억원(715만 9500달러)이었다.
내 눈엔 거저 준다면 모를까 우리집 거실에도 별로 걸어놓고 싶지 않은 만화 그림이었을 뿐이다.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1970

앤디 워홀은 숱한 기행과 말로 유명하다, 작품을 모르는 내게 그의 이름이 귀에 익은 이유다.
그가 했다는 말-"돈벌이는 예술이고, 노동도 예술이며, 돈 되는 비즈니스는 그중 최고의 예술이다"는 정확히 무슨 뜻으로, 어떤 상황에서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자본주의와 예술의 관계를 압축한다.

세상은 늘 기존에 있는 틀로 새로움을 판단하고 재단하려 한다.
하지만 어떤 예술가들은 사회와 불화를 만들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과 예술 방식을 추구한다.
기존의 틀로는 담아낼 수 없는 어떤 것들은 자주 우리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인사동에는 많은 갤러리가 있고 어느 때 가도 전시회가 있다.
새로움과 활기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가까운 그곳에 언제나 있다는 뜻이겠다.

인사동에서 경복궁을 지나 서촌까지 걸었다.
나는 늘 공식적인 자리보다 뒤풀이의 느슨함을, 술보다 술자리의 떠들썩함을 좋아한다. 

저녁을 먹고 나온 식당 근처에 요즘 세상에도 신청곡을 틀어주는 카페가 있었다.
LP판으로 직접 틀어주는 줄 알았더니 유튜브를 연결해 주는 것이란다.
일행 중 누군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무렵 카세트로 들었던 노래를 신청했다. 
비지스의 <매사추세츠>나 스캇 매켄지의 <샌프란시스코> 같은.
노랫말처럼 '매사추세츠에서 삶을 이야기하거나',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머리에 꽃을 꽂고' 싶다며 옛 기억을 더듬어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 시절에서 참 오래 그리고 멀리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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