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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골목길 지나 도서관

by 장돌뱅이. 2024. 7. 12.

이제까지 아내와 산책은 주로 강변과 공원, 가까운 대학 교정에서 했다.
얼마 전부터 혼자 걸을 때는 그런 깔끔한 풍경에서 벗어나 아무 골목이나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고 있다. 최종 목적지를 도서관으로 정하고 그냥 배회하듯 걷는 것이다.
배회는 도시를 깊이 인식하는 한 방법이라지만 도착하고 나면 인식은커녕 정확히 어디를 걸어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골목의 조합은 무한하다.

가급적 아파트 단지를 피해서 걷는 골목엔 30∼40년 전에 지어졌음직한 오래된 살림집과 빌라, 최근에 지어진 필로티 구조의  건물들이 있고, 거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식당, 카페, 제과점, 노래방, 세탁소, 편의점, 와인점, 학원, 태권도장, 부동산중개소, 재래시장 등이 이어진다.

나는 이 골목에 대하여 아무런 이해(利害)가 없다
그래도 골목은 늘 나를 받아준다

삼계탕집 주인은 요새 앞머리를 노랗게 염색했다
나이 먹어가지고 싱겁긴
그런다고 장사가 더 잘되냐
아들이 시청 다니는 감나무집 아저씨
이번에 과장 됐다고 한 말 또 한다
왕년에 과장 한번 안해본 사람…… 그러다가
나는 또 맞장구를 친다
세탁소 주인여자는
세탁기 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나에게 들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피차 미안한 일이다
바지를 너무 댕공하게 줄여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골목이 나에 대하여 뭐라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 골목 말고 달리 갈 데도 없다
지난밤엔 이층집 퇴직 경찰관의 새 차를 누가 또 긁었다고
옥상에 잠복을 하겠단다
나는 속으로 직업은 못 속인다면서도
이왕이면 내 차도 봐주었으면 한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는 몰라도
어떻든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고
누군가는 이 골목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상국, 「골목 사람들」-

가까이 있는 목적지를 멀리 돌아가야 도착할 수 있게도 하는 골목길엔 직접적이고 유동적인 만남과 접촉의 기회를 제공한다. 시처럼 골목 사람들과 일상 생활 속에서 어울려 지내지는 않지만 골목 산책길에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나는 갖가지 아기자기한 상상 속의 사연들을  겹쳐 보기도 한다.

공원의 숲이나 강변의 잘 정돈된 길을 한가로이 걷는 일은 여전히 좋지만  가끔씩 사람들이 사는 북새통의 골목 풍경 사이로 걷는 일도 색다른 느낌이 있어 좋다.
특히 밤이면 화려하게 변신하는 어떤 골목의 풍경은 어쨌거나 흥미롭다.

도서관은 종종 걷기의 반환점이며 나의 '서재'이다.
광진구립도서관인 자양한강도서관은 2020년에 문을 열었다.
1층엔 카페가 있고 2층과 3층은 열람실이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해서 들고 올라와 아내는 정호승의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를 읽고 나는 정혜신의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를 읽었다.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으면 다소 무거운 주제가 실린 책장도  한결 부드럽게 넘어간다.

성동구립 성수도서관은 2012년에 개관을 했다.
성수동 일대는 이름난 카페와 음식점이 많다. 도서관 가고 오는 길에 식사를 해결하곤 한다.
게다가 요즘 도서관은 분위기가 카페와 다르지 않아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기도 좋다.

그곳에서 아내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른하고 한가한 기분에 깊이 빠져들곤 한다. 책을 많이 읽지 않아도 성취감에 뿌듯해지기도 한다. 아내와 함께 읽은 이원복의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에대해 돌아오는 강변길에서 이야기할 때까지도 그런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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