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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한밤의 공포? 혹은 블랙 코미디?

by 장돌뱅이. 2024. 12. 4.

우리나라 광주 FC와 중국 상하이 하이강과의 AFC 참피언스 리그 축구 중계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비명을 질렀다.
"엇! 계엄령이 선포됐대!"

"진짜? 가짜뉴스 아냐?"
황급히 채널을 MBC로 돌렸더니 정규 방송 중이었고 속보 자막도 없었다.
JTBC로 돌렸더니 '그 XX'가 나오고 있었다.
"패악질···망국의 원흉···범죄자 소굴···종북···반국가 세력···척결··· "
정제되지 않은 살벌한 단어들이 술이라도 마신 듯 붉은 얼굴의 '그 XX'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유튜브로 돌려 <<미디어몽구>>를 보았다.
국회로 진입하려는 군인과 이를 막으려고 시민과 보좌관의 대치 상황이 나오고 있었다.
국회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과 뒷날 손자들을 보러 가야 하는 일정 사이에서 안절부절해야 했다. 딸아이가 다른 회사는 재택 근무가 결정된 곳도 있다면서 자신도 연락이 오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MBC뉴스 촬영

긴박한 상황은 190명 국회 만장일치 비상계엄 해제요구안 가결로 일단 끝이 났다. 다행이라고 말하기에는 국회 상공의 시커먼 헬기와 중무장한 군인들의 모습이 지난 80년을 떠올리게 했던 길고 끔찍한 150분이었다. TV와 유튜브를 바쁘게 오가다 울컥하는 마음에 아내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런 나라에서 어린 손자들이 자라야 할까?

87년 이후 자부했던 우리의 민주화에는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CNN뉴스 화면 촬영

CNN도 'SOUTH KOREA IN CHAOS'라는 제목으로 한국방송을 인용하는 속보를 내면서 "President legally obligated to comply with vote, but not clear if he will."라고 했다.
(대통령은 법적으로 투표 결과에 따를 의무가 있지만 그가 그렇게 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not clear?'······
앞으로의 며칠이 특별히 중요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TV에서 잠시 눈을 풀고 낡은 시집을 꺼내 80년대의 시 한 편을 읽었다.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너무 한가로운 타령일 수도 있지만.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 최승호, 「대설주의보」-

새벽 4시.
딸아이의 재택근무 소식은 오지 않았다.
손자들을 위해 일단 잠자리에 들어가 눕기로 했다.

쉬이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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