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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무덤 밖에 계신 그리스도

by 장돌뱅이. 2025. 4. 23.
*민화랑 소속 작가님의 부활절 그림

2025년 4월 20일 부활주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론하셨다.
안젤로 코마스트리 추기경이 대독한 강론에는 카톨릭을 넘어 모든 종교와 종교인들이, 그리고 올바르게 일상을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종교와 삶의 보편적 진리가 담겨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의 돌이 치워진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알렸습니다. 깜짝 놀란 두 제자도 길을 나서는데, 복음서에 따르면 “두 사람이 함께 달렸다”(요한 20,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달리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달린 이유가 주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걱정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리아 막달레나, 베드로, 요한의 서두름은 마음의 갈망, 곧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내면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더 이상 죽음의 포로가 아니시며, 수의에 감싸여 계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단지 옛 이야기 속의 인물로, 고대의 영웅으로, 박물관 속 조각상으로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일어나서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삶 속에서, 우리 이웃의 얼굴 속에서, 일상적인 일 속에서, 무덤이 아닌 모든 곳에서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쉬지 않고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부활하셨기에, 이제 어디에나 현존하시며,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가 만나는 형제자매들과의 길 위에서, 일상의 평범하고도 뜻밖의 순간들 속에서 당신 자신을 감추시기도 하고 드러내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살아 계시며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을 통해 함께하시고, 우리 각자가 행하는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삶을 아름답게 하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부활 신앙은 안락한 “종교적 위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활은 우리를 행동하게 합니다. 막달레나와 제자들처럼 달려가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우리는 매일 주님을 잃는 듯한 경험을 할 수도 있지만, 매일 다시 그분을 찾아 달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반드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당신을 발견하게 해 주실 것이며, 당신 부활의 빛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우리 삶의 가장 큰 희망입니다.
우리는 이 가난하고, 연약하고, 상처 입은 삶을 그리스도께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죽음을 이기셨고, 우리의 어둠을 이기시며, 세상의 그늘까지도 이기셔서 기쁨 가운데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오로가 말한 우리의 목표입니다.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의 것을 향하여 달려” (필립 3,13-14) 나아가는 것이지요.
마리아 막달레나, 베드로, 요한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갑시다.

희년은 우리 안에 희망의 선물을 새롭게 하라고 초대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근심을 희망 안에 맡기고, 길에서 만나는 이들과 희망을 나누며, 우리 삶의 미래와 인류 가족의 운명을 희망 안에 맡기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덧없는 것들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슬픔에 굴복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기쁨으로 달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달려갑시다. 그분의 친구가 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총을 다시 발견합시다. 그분의 생명과 진리의 말씀이 우리 삶을 비추게 합시다.

위대한 신학자 앙리 드 뤼박이 말했듯이,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그리스도교는 곧 그리스도다. 아니, 진정으로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다.”
(앙리 드 뤼박, 「오늘날 세상에서 가톨릭의 교리적 책임」, 파리 2010, 276쪽)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신 이 ‘모든 것’이 우리 삶을 희망으로 열어줍니다. 그분은 살아 계시며, 오늘도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이 축일에 저희도 새로워질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이 영원한 새로움의 체험에 이르게 해주십시오. 습관의 슬픈 먼지와 피로, 무관심에서 저희를 정화하시고, 매일 아침, 놀라움으로 눈뜨게 하소서. 이 아침만의 새로운 빛깔을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주님. 아무것도 예전과 같지 않으며, 아무것도 낡은 것이 없습니다.” (아드리아나 차리, 「마치 기도처럼」)

자매 형제 여러분, 부활 신앙의 경이로움 안에서, 평화와 해방에 대한 모든 기대를 마음에 품고,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됩니다.”

*전종원 화백의 인스타그램

프란치스코 교황은 부활절 뒷날에 선종 하셨다.
나는 물론 교황에대해 자세한 건 알지 못한다. 
넷플릭스에서 본 유쾌한 영화『두 교황』과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행적이 전부이다.
그러나 2014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세월호 유가족이 전해준 노란 리본을 달고 공식 일정 소화한 후 '그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가 한 대답이 그의 생애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교황은 종교의 경계를 스스럼없이 넘나들었고 갈등의 중재자로 평화의 선포자로 헌신했다.
복잡한 세상의 갈등을 일거에 풀어내는 신통한 묘책이나 객관적인 당위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주'는 아픔과 슬픔의 공감을 이야기했다.

그의 영면을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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