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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28번째 결혼기념달

by 장돌뱅이. 2012. 10. 27.

10월은 아내와 내가 결혼을 한 지 28년 째 되는 달이다.
동갑인 아내와 내가 각각 처녀, 총각으로 산 햇수와 결혼을 해서 산 햇수가 같아지는 달이기도 하다.

8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생각할 무렵 공교롭게도 양가 집안에 예상치 못한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쳤다. 
비즈니스 플랜을 짜듯 결혼에 대한
‘사업 타당성 검토’를 했다면 한마디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아내는 강원도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었고, 남들과 차별성(?) 있는 학업성적서를 지닌 나는 숱한 입사지원서를
남발한 끝에 간신히 지방에
막 직장을 잡은 터라 생활을 합치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내가 군대를
다녀오는 사이 어느 새 교사 3년 차가 된 아내는 봉급이 나보다 높았다.
내가 빨래와 밥짓기를 배워 강원도로 가는 것이 내 집 마련의 지름길 아니겠냐는 친구들의 (농담만은 아닌) 충고도 있었다. 
경제 문제에
대한 나의 비현실적인 사고와 부실한 능력을 알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신혼은 내가 있는 쪽에서 시작되었다.
우유부단한 나를 대신해 아내가 내 집 마련의 ‘지름길’을 포기하고 ‘우회도로’를 택한 것이다. 
저금통장에 단돈 백만 원도 가지고 있지 못한
나는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단칸셋방을 마련하고 결혼식을 치렀다.

신혼여행이랄 것도 없이 속리산 일대를 잠시 둘러보고 온 날 저녁
비로소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나는 아내에게 기대어 어린 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아내는 그런 나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날 저녁뿐 이튿날부터 나는 결혼 전과 변함없이 사람들과 어울리고 술 마시며 늦은 귀가를 일삼았다. 
외상 술값을 미리 제하고 건네주는
얄팍한 월급봉투에 아내는 늘 ‘보릿고개’의 가사를 꾸려가면서도
(입사 초기 몇 년은 은행 입금 대신에 현금으로 월급을 받았다)
“수입 대비 문화교제비 항목이 높을수록 선진국이라는데 적어도 우리 집 지출 형태는 대단한 선진국형이네.” 하며 웃었다.

아내는 그렇게 혼자서 생활의 외풍을 감내해주었다.
그 덕분인지 그 시절 나는 단 한 번도 우리의 가난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고민은커녕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돈이야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 돼지비계 넣고 끓인 김치찌개에 소주 한 병 내놓을 정도면
족하지 않냐고 뻔뻔한 허세까지 부려가면서.
나는 대책 없는 철부지거나 응석받이였을 뿐이다.

그때는 뭔 놈의 회사일이 많기도 했다. 매주 토요일 잔업은 물론 대부분의 일요일도 출근을 해야 했다.
“또 출근이야?”
어느 일요일 아침 출근복을 걸치는 내게 아내가 물었다. 신혼 6주 째 연속 출근이었다.
하루아침에 생면부지의 타향에서 생활하게 된 아내는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신랑인 나뿐인 터라 외로움도 깊었을 것이다.
“이래야 출세한다잖아.”
나의 대꾸에 아내는 실소를 했다.
“출세? 그까짓 거 안 해도 괜찮으니 오늘은 하루 좀 쉬어라.”
그 말에 나는 선심을 쓰 듯 회사를 제끼고 아내와 외출을 했다.

어느 덧 28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내를 만나기 위해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서울 무교동의 길거리를 달려가던 설렘과 가로수 사이로 축복처럼 쏟아져
내리던 푸른 하늘과 맑은 햇살, 그 젊은 날의 기억이 여전히 말랑말랑하여
아침마다 거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서는 초로의 사내가 낯설어 질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란히 선 아내와 그 시절의 모습을 겹쳐 떠올리며 킬킬 웃기도 한다.

어느 것 하나 뚜렷이 이룬 것 없고 남은 시간을 위해 옹골지게 준비한 것도
없다는 점에서 나는 여전히 28년 전의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뭐 어떠랴. 
아내가 이미 오래 전 나의 출근을 막아서면서 ‘무(無) 출세’를
허락도(?) 해 준 터인데.^^

결혼기념일을 길게 자축하기 위해 10월 한 달을 기념의 달로 잡았다.
어린 시절의 추석과 설날처럼 명절은 길수록 좋은 법 아닌가.
주말을 이용한 3가지 일정을 만들었다.

첫 번째는 샌디에고 근교의 테메큘라 TEMECULA 와이너리에서의 숙박,
두 번 째는 역시 샌디에고 근교의 사과파이로 유명한 줄리안 JULIAN 에서의 캠핑,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아내와 함께 5킬로미터 달리기 대회 출전이다.

결혼기념일이 아니더라도 계획했을 일정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의 일이란 게 의미를 붙이기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아내와 나는 어디선가 들은 구절을 표절하여
“기념일을 일상처럼 일상을 기념일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첫 일정 테메큘라는 샌디에고에서 북쪽으로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내륙에 있다. 이곳에는 18개의 와이너리가 있다. 그중에
숙박 시설을 갖춘 곳도 있는데 우리가 택한 곳은 SOUTH COAT WINERY & SPA였다.


*위 사진 : 기념일 특별 장식을 해준다기에 아내 몰래 얼마의 추가 비용을 내며
              준비를
했는데 설명처럼 낭만과 감동 대신에 썰렁함으로 큰 웃음을
              선물해 준 
숙소의 장미꽃 장식.               

 

와이너리에서 할 일은 단순하다. 그냥 쉬는 것이다. 수영을 하고 책을 읽고
포도밭을 산책했다. 10월 초의 포도밭은 정점을 지나 대부분 수확이 끝난
상태였으나 가끔씩 아직 채 거두지 않은 포도도 있어 다행이었다.
와이너리 투어나 시음은 하지 않았다. 대신에 투숙객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한 병의 와인으로 우리의 결혼기념일을 자축했다.

 

 

 

이튿날 아침엔 기구를 타보았다. 해가 뜨기 전 숙소에서 출발하여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고려한 적당한 장소에서 이륙을 하였다.
공중에는 1시간 정도 떠 있었다.

타기 전 비행 중에 기구가 많이 흔들리지 않냐고 물었더니 머리카락
한 올도 흩날리지 않을 거라는 담당자가 대답해주었다. 다분히 탑승객을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 기구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잔잔하게 흘렀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테메큘라의 아침 풍경이 신선했다.
  

 

 

 

 

 

 

 

 

 

 

 

 

같이 동승했던 젊은 중국인 커플은 아직 혼전이었던 모양이다.
대만인 사내는 착륙 직후 무릎을 꿇으며 본토 중국인 신부에게 반지를 건네며
청혼을 했다. 신부는 수줍게 청혼을 받아들였고 함께 투어를 마친 우리는 박수로
축하해주었다. 사내가 직접 디자인 했다는 작은 다이아 반지는 아내를 포함한
모든 참석 여자들의 부러움을 샀다.
“당신이 반지를 꺼내기 전까진 우리도 좋은 분위기였다.”고 내가 과장을 섞어
투덜거리자 귀공자 타입의 젊은 대만 사내는 더욱 행복한 표정으로 싱글거렸다.

포도밭이 내려다보이는 장소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가 제공 되었다.
식사 도중 결혼기념일을 맞는 몇몇 커플들에게 와인이 한 병씩 제공 되었다.
우리도 이름표가 붙은 와인을 받았다. 몇 주년이냐고 물어 28주년이라고 밝히자
일시에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장수'비결을 묻는 사람도 있었다.
 

 

 

 

테메큘라를 다녀온 일주일 뒤 캠핑을 했다. .
그믐이라 별이 유난히도 많은 밤이었다.
모닥불을 피우고 일렁이는 불빛 속에 앉아 옛 노래를 불렀다.

 

세 번째 일정 달리기.
아내로서는 처음 달려보는 5키로미터이자 첫 공식대회 출전이었다.
“FUN WALK & RUN”이라는 구호에서 보듯 가벼운 분위기의 대회였다.
각종 분장을 환영하며 포상도 했다.

아내의 목표는 40분 이내 완주.
그런데 이 날 뜻밖의 해프닝이 있었다. 차의 네비가 잘 말을 듣지 않아
내가 출발지점을 못 찾고 헤매는 바람에 출발 10여 분이 지난 후에야 
경기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소규모대회인지라 진행 요원은 늦은 출발을 허락해 주었다. 다만 너무 늦은
출발이라 전자칩에 의한 기록 측정은 무의미하게 되었다. 샌디에고 답지 않게
비까지 부슬거리는 날씨에 대열 맨 후미에서 뛰는 쑥스러움 속에서도 아내는
열심히 뛰어 38분대에 완주를 했다. 보통 사람들에겐 별 것 아닌 기록이지만
체력이 약한 아내로선 최선을 다한 결과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아내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같이 뛰었다.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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