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그림 : 박수근 화백의 「아기 업은 소녀」
퇴근길에 공장 정문 주위에 어떤 소란이 있는 것 같았다. 멕시칸 직원들이 여러 명 모여 있었다.
천천히 차를 몰고 다가가자 웬 여인이 경비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 유리문을 내리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여인이 불쑥 내 앞으로 다가섰다.
경비는 다짜고짜 한국인 책임자를 만나게 해달란다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가로막는 경비를 제치고 여인은 급하게 무슨 말인가를 한꺼번에 쏟아냈다.
서바이벌 수준의 나의 스페인어로는 알아들을 수 없어 영어가 가능한 멕시칸 직원의 도움을 구했다.
여인의 말은 돈을 좀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딸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당돌한 여인의 행동이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얼굴을 맞댔으니 대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당신을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돈을 빌려주겠냐고 했더니 자기는 가까이에 있는 공장 안에 산다고 했다.
철재와 목재류를 취급하는 그 공장의 미국인 사장과는 가끔 안면은 트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공장 안에 사람이 산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그 공장을 방문하여 미국인 사장과 미팅을 할 때의 나를 기억하는 것 같았다.
자기 사장이 출타 중이어서 그곳에서는 돈을 변통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300페소(미화 23불 정도)를 빌려주면 며칠 뒤에 반드시 갚겠다고 했다.
지금 없는 돈이 며칠 뒤에는 어떻게 생기느냐고 물었더니 임금을 받으면 바로 갚겠단다.
멕시코는 주급이라 며칠 뒤인 금요일에는 돈이 들어올 수 있는 일이었다.
마침 내 주머니에는 얼마간의 멕시코 돈이 있었다.
여인 뒤쪽에 서 있는 멕시칸 직원은 고개를 살짝 가로로 저으며 부정적인 눈빛을 보내왔다. 솔직히 나도 썩 내키지 않았다.
소란을 피우며 막무가내로 책임자와 대면을 요구하고 돈을 빌려달라는 생면부지 여인의 당돌한 억척이 부담스럽고,
300페소로 해결될 정도라면 딸아이 질환이 그리 급한 것일까 하는 의문도 생겼다.
그러나 만에 하나 사실이면... 딸아이가 정말 많이 아프다면...
딸아이와 상관없다고 하더라도 3만 원의 돈이 최소한도로 절박하게 필요한 상황이라면...
설사 떼인다고 해도 3만 원 아닌가...
나는 솔직히 자포자기, 억지춘향의(?) 심정으로 돈을 꺼냈다.
퇴근을 멈추고 호기심에 바라보는 많은 멕시칸 직원들의 시선도 신경쓰였다.
그런데 하필 가진 돈이 500페소짜리뿐이었다.
돈을 빌리러 온 여인에게 잔돈을 거슬러 달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그대로 줄 수밖에 없었다.
직원에게 차용증을 받아두라고 하고 퇴근을 했다.
그날 저녁 오랫동안 멕시코에서 사업을 해온 사람들과 모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대부분 칼같이 거절했어야 한다는 충고를 해주었다.
안 그러면 다음에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그 여자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또 올 것이라고 했다.
그 여자가 그 돈으로 마약을 샀을 것이라 단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멕시코라지만 300페소에 그런 소란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은 마약을 구하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한다지 않던가.
멕시코에서 매우 저렴한 가격에 손쉽게 마약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이미 상식이었다.
심지어 공장 노동자들(특히 야간작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슨 각성제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그러다 보니 멕시칸 직원을 채용할 때 마약검사를 하는 회사도 있다고 들었다.
경험과 추측은 다양했지만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내가 돈을 못 돌려받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그 뒤 어느 날 외근에서 돌아와 공장 사무실에 들어서니 한 직원이 내게 100페소짜리 다섯 장을 내밀었다.
'무슨 돈?' 하는 나의 표정에 그는 이웃 공장의 여인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주고 갔다고 했다.
아! 금요일이구나!
그 순간 몇 푼 안 되는 돈에 한 사람의 진정성까지 의심했던 며칠 전 나의 쫀쫀함이 부끄럽게 떠올랐다.
그리고 썩 내키지 않는 찜찜함 속에서나마 그 여인에게 돈을 빌려주도록 손을 움직여준 하늘에 감사했다.
외국에서 생활하면서(국내 생활도 마찬가지겠지만) 가끔씩 느끼는 건 사람들의 현지인에 대한 과장된 상상력(?)이다.
흔히 '여기 애들은 말이야'로 시작하는 무수한 단정과 견고한 언어들은 한 사회와 사람들을 바라보는 편견이 되어,
또 다른 상상과 소문을 증폭 시키곤 했다.
나 역시 은연중에 가난과 마약과 범죄를 이음동의어쯤으로 이미 판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려받은 5백 페소를 선뜻 지갑에 넣지 못 하고 손에 쥔 채 자리에 앉아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의 '애정어린' 염려와는 달리 그 이후 지금까지 6개월이 넘도록
그 여인이나 다른 누구도 다시 돈을 빌리러 오는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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