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남도 여행길에 유명한 남도의 한정식을 먹을 때 옆에서 식사를 하시던
노인 한 분이 내게 이것만 먹어도 다른 것 다 먹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내가 젓가락도 대지 않던 자그마한 종지 하나를 가리켰다.
그것이 민물새우젓, 즉 토하젓이었다.
노인 생각에 진정한 남도의 맛을 모르고 다른 곳에서도 먹을 수 있는 음식에만
부지런히 젓가락을 대는 나의 짧은 안목과 입맛이 답답하셨던 모양이다.
남도의 한정식에서 젓갈류 3가지 이상을 먹지 못하면 헛먹은 것이라고 하시면서.
맛은 수천년 동안 세월을 거듭하며 형성된 것이다. 사당리의 청자 빛깔과
무위사 벽화의 선 감각을 안다면 맛의 감각은 저절로 따라붙기 마련이다.
이른 봄 백련사의 동백꽃과 대흥사의 동백 빛깔이 같은 종의 유전자 감식
인데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은 상식이다. 생생력(生生力)의 문화를 일으킨
멋과 맛의 차이성 - 이것을 문화의 차이성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음식은 단순히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느끼고
숨쉬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 송수권, 『남도의 맛과 멋』중에서 -
한정식은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종합예술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전통의 방식대로 상을 차리기가 여려워진다고 한다.
대부분 조리 과정이 오래 걸리고 계절별로 꾸미감이 틀리니 구입도
수월찮은데다가 격식을 갖추어 더운 음식과 찬 음식을 구분하려다보면
많은 공력을 필요로 하게 된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간편한 쪽으로
상차림이 변화되어 가고 제대로 된 음식을 접하지 못해 나처럼 전통음식에
무지해져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우리의 음식문화도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가시적인 문화유적에 대한 보호도 필요하지만 우리 음식을 지키고 보존하고
대중적으로 나눌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는 방안의 모색도 필요한 시점이겠다.
서울 장안에 이름난 한정식집 몇 곳을 소개해 본다.
1. 청담동 용수산(龍水山)
용수산은 개성 남쪽에 있는 산이라고 한다.
이름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식당 용수산은 깔끔한 개성음식을 기본으로 하는 한정식
집이다. 서울 시내에만 여섯 군데의 직영점이 있고 미국 L.A에까지 진출했다는 사실이
식당 용수산의 성공담을 말해주는 듯 하다.
아내와 내가 가본 곳은 그 중 청담동 용수산이다.
청담사거리에서 학동사거리 방향으로 청담주유소 맞은 편에 있다.
한정식집답지 않게 서구식 외관을 지녔다.
3층으로 된 청담점의 1층은 테이블이 놓여진 홀이었다. 아내와는 이곳에서 식사를 하였다.
2-3층엔 온돌방 형태로 되어 있다고 한다.
한정식이라는 말에 처음에 아내와 나는 수십 가지 음식이 한 상에 동시에 올라오는
남도 한정식을 생각했다. 언젠가 남도 여행길에 강진에서 먹었던, 남도 인심같이 푸짐한
상차림과 하나도 빼놓을 게 없던 음식맛에 깊은 인상을 받은 탓이다.
그러나 용수산의 한정식은 한가지씩 순서대로 나온다.
원래 한정식은 굽거나 튀기거나 끓인 음식은 코스별로 들여오는 것이 정석이라고 한다.
이 과정이 지켜지지 않으면 제대로의 맛과 멋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높아진 인건비와 관광지의 분주함은 코스별로 나와야하는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케 하고 모듬 한 상으로 단순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때문에 한정식집은 음식을 파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파는 곳이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소바 한그릇을 놓고 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 막부시대의 전통을 우리집에선
그대로 잇고 있다고 자랑하는 일본 업소의 옹졸한 사무라이 근성을 폄하 할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 식탁도 차별화의 세련된 근성이 나와야 할 때다. 이것이 다름
아닌 살아 남기의 전략이며 세계화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송수권, ‘남도의 맛과 멋’ 중에서-
용수산에는 7가지의 코스 요리가 있다 물론 일품요리의 주문도 가능하다.
아내와 내가 주문한 요리는 코스 요리 중 중간 가격대인 금산정식이었다.
죽과 물김치로 시작해서 십여 가지의 요리가 나온 후 식사가 이어졌다.
식사는 몇 가지 중에서 선택을 하라고 하여 우리는 대나무밥을 골랐다.
개성음식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오감을 즐기는 음식이라고 한다.
아내는 그런 오감에 매우 만족해 하였다.
분위기와 맛, 직원들의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한정식의 격이 느껴지는 식당이었다.
*전화 : 546-0647
2. 경운동 민가다헌(閔家茶軒)
경운동 운현궁 맞은편 천도교중앙교당 바로 옆에 있는 민가다헌은, 전통 한정식집이
아니라 한식 퓨전 음식점이다.
1936년 지어진 개량한옥의 식당 본 건물은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식당이라기보다 예스런 문화재를 보러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야트막한 담장 속에 아담하게 솟은 대문을 들어가면 흙이 드러난 마당과 작은 화단,
그리고 작은 투명 유리창이 달린 기와집이 운치 있어 보이는 곳이다.
한식퓨전 음식과 와인을 주로 한다. 차도 마실 수 있다.
개인적으론 음식의 맛보다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햇볕이 따사로운 날이면 이곳의 정원이나 창가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근처의 창덕궁이나 운현궁을 다녀온 뒤면 더욱 느낌을 좋을 것이다.
(전화 : 02-733-2966)
3.수서동 필경재(必敬齋)
우리나라 일반 국민들의 문화재를 보는 수준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책으로
일거에 업그레이드 시킨 유홍준씨는 문화재 청장으로 재임시절 창경궁에서 외국
손님들과 만찬을 즐기는가 하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효종대왕릉에서 가스통까지
갖다 놓고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은 탓에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무슨무슨장(長)’ 이라는 감투는 그래서 쓰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일반인들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을 거푸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특권이 있으니까.
(*2012년 수정 덧붙임: 고궁에서의 만찬은 다른 나라에서는 국빈을 대접하는
관례라고 한다. 이 말이 맞다면 위 글은수정되어야 한다.)
아무튼 해묵은 유적지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일반 식당에서 먹는 것과는 다른 정취와
멋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화재청장이 아닌 사람도 그와 비슷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 바로 수서동에 있는 필경재 같은 곳이다.
‘반드시 웃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자세를 지니고 살라’는 뜻의 필경재는 세종대왕의
5남인 광평대군의 증손 이천수라는 사람이 건립하여 500년의 역사를 지닌 건물이다.
1987년에는 문공부에 의해 전통건조물 제 1호로 지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옛 건물과 초록의 숲이 어우러진 필경재로 들어서면서 딸아이는 요즈음 유행어로 감탄을 했다.
“와아! 집이 장남이(장난이) 아니구 막내도 아니네.”
방안의 장식도 유리와 창살을 통해 내다보는 정원의 모습도 깔끔하고 단정했다.
필경재는 딸아이의 취업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호박죽과 냉채류, 보쌈김치, 탕평채, 구절판, 전, 떡갈비구이, 간장게장, 생선찜과 구이 등이 나왔다.
생선찜를 제외하곤 모두 만족스러웠다. 맛과 멋이 어우러진 식당이었다.
사용되는 그릇 또한 유명한 안성 유기 제작자인 김근수옹의 작품이었다.
계피떡과 과일, 차가 나오는 후식은 밖으로 나가 정원을 바라보면 할 수 있었다.
후원이 흙마당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후식을 먹는 동안 직원 한명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워키토키로 차를 대기시키라고 연락을 했다.
세심한 배려였다.
*02-445-2215
4. 세검정의 석파랑(石坡廊)
세검정 삼거리에서 자하문 쪽 방향을 바라보면 오른편으로
보기에도 멋진 한옥 몇 채가 언덕의 숲 속에 운치있게 들어서 있다.
한식 전문점 석파랑이다.
대원군의 별장과 순종의 황후 윤씨의 생가를 옮겨와 개조한 것이라 하니
예사 건물이 아닌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식당이라기보다 종가집 고가나 공원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몇 가지 한정식 코스와 일품요리들이 준비되어 있는데 맛과 모양새가 빼어나다.
음식마다 현대식 취향이 가미된 음식이므로 세대와 국적에 관계없이 즐길 수
있다고 생각된다.
식사를 하고 정원에서 차를 마시면 도심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음식도 분위기도 종업원의 친절도 가히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식당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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